“본인이 자청했다.”

프로든 어디든 제가 가장 듣기 불편한 말 중의 하나가 ‘본인이 자청했다. 본인이 던지겠다는 의지가 강해서’ 이런 류의 멘트인데요. 혹사 감독들의 단골 레파토리입니다. 자신의 책임을 교묘하게 부정하는 말입니다.

2차 세계대전 후 전범 재판을 기록한 한나 아렌트는 독일 장교 아이히만에게 유태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일이 힘들지 않았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뜻밖에 아이히만은 이렇게 답했다고 하죠.

“힘들지 않았다. 사실은 쉬웠다. 우리가 쓰는 언어가 그걸 쉽게 해줬다. 우린 그 언어를 암트스프라헤Amtssparache’라고 불렀다.”

암트스프라헤는 굳이 옮기자면 ‘사무 용어’, ‘관료 용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공공기관이나 기업을 상대로 민원을 넣을 때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나로서는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다.’, ‘상관의 지시였다’, ‘규칙이 그렇다’…

‘본인이 자청했다’도 비슷한 맥락의 표현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번 황금사자기 끝나고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한 책임을 인식하고, 또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위험한 존재가 됩니다. 아이히만처럼.

“본인이 자청했다.””의 2개의 댓글

  • 2017년 5월 22일 10:3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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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미국에서 야구하는 아이를 둔 부모입니다. 이걸 보니 예전 경험이 떠오르네요. 아이가 9살 때 제 아이 팀의 코치가 경기 전에 아이를 마운드에 올려서 몸을 풀게 하더군요. 제가 같은 팀의 보조 코치여서 바로 가서 어제 던졌기 때문에 오늘은 아이를 올리면 안된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애가 원해서 했다고 하면서 되려 화를 내더군요. 그래서 어찌됐거나 어제 많이 던져서 오늘은 안된다고 하면서 당장 내리라고 했습니다. 자초지종을 알고보니 아이한테 가서 던지고 싶냐고 물어봤더군요. 당연히 아이는 던지고 싶다고 했구요. 저한테 물어보면 안된다고 할 것을 잘 아는 사람인데 그런 방식으로 이유를 아이한테 돌리는 것을 보고 참 화가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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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년 6월 1일 11:4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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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러셨군요. 그래도 용기있게 잘 대응하셨네요. 한국은 감히 말도 못하는 분위기인데 그나마 부럽기도 합니다.^^ 경험을 나눠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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