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선수가 되어도 공부는 삶의 일부다 (박철, 엘론베이스볼랩)

우리나라 학생야구선수의 일본 중,고교로의 진학을 타진하기 위해 후쿠오카의 한 국제고등학교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고시엔에도 출전한 적이 있는 전통의 야구부였다. 정규 수업이 끝나고 전교생이 부카쯔(부활동部活動)를 위해 삼삼오오 흩어져 모이는 모습도 장관(壯觀)이었지만, 정말 충격적인 것은 야구부원들의 인터뷰였다.

장래 희망을 묻는 질문에 프로야구선수가 되겠다는 학생들은 극히 소수였다. 그렇다고 의사, 변호사 등과 같이 구체적인 직업을 거론하는 학생도 많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앞으로 이런 공부를 더 해보고 싶다는 학생이 주(主)를 이루었다.

‘일반학생은 운동을 좀처럼 하지 않고, 학생운동선수는 공부를 거의 하지 않는’ 우리나라 교육현실을 떠올렸을 때 부럽다는 생각보다는 큰 충격이었다. 그간 우리나라에서는 ‘체력은 국력, 국력은 세계대회의 메달 색깔과 숫자’라는 성적지상주의가 엘리트체육과 생활체육의 조화로운 공존을 위협해 왔다. 많이 늦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학생선수의 ‘학습권 보장’의 중요성이 전보다 적극적으로 대두되고 있고, 관련해서 많은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매우 다행스러운 변화이지만 현장을 들여다 보면 아직은 요원한 상태다. 동일한 전철을 밟았던 미국, 일본, 영국 등의 시스템을 차용하는 것이 응급처방으로는 요긴하나, 그 시스템을 지탱하는 구체적 실행계획이나 재원 투자는 아직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학생선수들의 속마음

게다가 ‘프로진출 실패가 곧 인생의 실패’라 여기는 선수들의 진짜 속마음을 수렴하는 과정이 생략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래서 이글을 준비하며 학생선수들의 진심이 어떤지 들어 볼 기회를 가져보았다. 선수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을 때는 대부분 공부를 압박하는 분위기에 분노를 쏟아냈다.

“프로에 들어가려면 한 해에 10% 안에만 들면 된다. 공부보다는 운동에 전념을 해야지 왜 공부에 시간을 뺏기나?”
“밤 10시까지 운동하는데 우린 언제 쉬나?”

하지만 1대1로 이야기를 하며 “솔직히 공부할 시간이 없지는 않자나?”라고 물으면 겸연쩍은 미소를 띠며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선수들이 많았다.

“운동선수는 공부 못해도 운동만 잘하면 된다는 말에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이 매우 안좋다.”
“솔직히 공부도 해야한다는 생각이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실력으로는 프로에 갈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그만 두고 공부를 한다는 것은 더 어렵다.”

선수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쩌면 우리 학생선수들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공부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어른들의 생각보다 더 크게 자리잡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선수들에게 필요한 것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가치관의 주입보다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지원시스템’의 마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일어났다.

플랜B를 요구하지 말고 지원하자

현실에 맞는 ‘지원시스템’ 없이 공부를 해야만 운동도 할 수 있다고 강요하는 방식은 학생선수에게만 실패의 몫을 고스란히 전가시키는 일방적이고 무책임한 기준이다. 또한 학생선수들이 공부를 해야만 하는 이유가 ‘이번 시험 100점 받으면 야구하게 해줄께’ 하는 식의 동기부여가 되어서는 안된다.

학생선수들에게는 ‘프로진출의 꿈을 이룬다 해도 은퇴후의 삶(플랜B)을 위해 공부는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라는 자각이 필요하다.

한때 명문대 출신이나 고졸 출신이나 결국 노년에는 치킨집을 차린다는 농담 아닌 농담이 있었다. 이제는 프로출신 선수들이 은퇴 후 레슨장 개업에 내몰리고 있다. 1년에 수많은 레슨장이 생기고, 운영의 미숙함으로 그 수만큼 폐업을 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치킨집 농담을 떠올린다. 게다가 과도한 경쟁으로 인한 일부 레슨장의 일탈행위가 오히려 학교 스포츠교육 현장의 붕괴에 촉매 역할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학생선수들의 플랜B를 위한 학습 시스템 구축은 오랜 세월에 걸쳐 문제가 얽히고 섥혀 있는 해묵은 난제다. 그때그때 표면적인 해결책으로 드러난 문제들을 봉합해온 결과 우리 아이들은 ‘오징어 게임’과 같은 살벌한 서바이벌 게임 속에서 서서히 병들어가고 있다. 체육특기자 대학입시제도만 만지작거리는 것은 결코 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현실적으로 당장 가능하리라는 기대는 쉽지 않지만 우리 아이들이 ‘오징어 게임’에서 빠져 나오는 출구전략은 미국 LA의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SC)의 막대한 재정투자를 기반으로 하는 인프라와 선수 개인별 멘토링 지원 사례에서 엿볼 수 있으며, 일본 학교내(內) 부카쯔 활동에 대한 ‘국가의 재정적 지원’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시급한 것은 ‘일반학생들과도 어울려 누릴 수 있는 학창시절’과 ‘야구를 잠시 내려놓고 가족과 온전히 편하게 쉴 수 있는 Sweet Home’을 아이들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21개의 부카츠(방과후 활동)를 운영중인 야나가와 고등학교의 교장선생님께서는 재정적인 부담을 묻는 질문에 교육의 일환으로서 스포츠 활동의 가치를 강조하셨다)

센터를 운영하는 3년동안 아이들의 진심을 엿볼 수 있는 찰나의 순간들이 있었다.

“이제는 야구를 그만하고 싶은데 저 때문에 고생하시는 부모님께 죄송해서 그만두겠다는 말을 못하겠어요.” “저 지금 야구 그만두면 뭘 할 수 있을까요?” “저 프로에 가지 못해도 센터에서 일하게 해줄 수 있으세요?”

이런 말들을 털어놓으며 눈시울을 붉히던 아이들이 있었다. 그런 속마음을 내뱉으며 잠시마다 짐을 내려놓은 듯 후련해하는 모습을 아이들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박철
엘론베이스볼랩 대표
(전) 한국청년취업개발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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