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세계 최고의 선수가 돼서 돌아오겠습니다.
SNS에서 우연히 발견한 글입니다. 출처를 남기고 싶은데 찾지를 못하겠네요. 9살부터 야구를 시작했고, 지금은 미국에서 루이지애나 주립대학 투창선수로 활동하고 있는 레이박씨의 글입니다. 읽는 내내 마음이 헛헛합니다.
세계 최고의 선수가 돼서 돌아오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농구가 너무 좋아서 xxx에 가입을 했던 소년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만으로 20살이 된 성인이네요. 이글을 마지막으로 카페를 장기간 떠나려고 합니다. 제가 쓰고 있는 이글이 나중에 꼭 발견이 됐으면 좋겠네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제가 운동선수가 될 것이라는 아버지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지만 아버지의 어릴적 꿈은 야구선수가 되는 것이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집안형편이 넉넉하지 못해서 야구라는 운동을 하지 못하셨고요. 그래서 아버지는 저의 미래를 미리 정하시게 된거거요.
하지만 제가 태어난지 얼마 후 의사선생님께서 제가 심장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을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계획은 날라가는듯 했었죠. 의사선생님께서 제가 성장을 못하고 평생 몸이 약할 것이라고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었죠. 선천적 심장병이 있는 저는 어린이집도 제대로 못 다니고 관두게 됐습니다. 7살 때 심장수술을 받게 됐고 다행히 제가 건강 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의사선생님은 제가 성장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했네요.
저희 아버지는 저의 건강을 운동으로 찾겠다는 핑계로 제가 9살 때 엘리트 야구부로 보냈습니다. 제가 다녔던 야구부에서는 불법적으로 숙소생활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숙소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아직도 생각을 하기 싫을정도로 큰상처네요. 또한 저희 아버지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고 또한 올림픽 대표팀 코치셨기에 다른 올림피언들이나 프로선수들 그리고 코치분들이 저에 대한 기대치가 컸습니다. 저는 야구가 너무 싫었고 5학년 때 감독님께 구타를 지속적으로 받은 탓에 우울증으로 야구를 관두게 됐습니다. 제가 관둘 때 아버지랑 코치님들 그리고 아버지 친구분들이 저를 불러서 한방에서 저를 약하다고 놀리던 그날은 제인생 최악의 날이였습니다. 엄청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야구를 관둔 후 운동은 저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미리 알았네요. 제가 운동을 관뒀을 때 저희 사촌형이 한국 대학포지션 랭킹 1위에 선수였습니다. 사촌형 저에게 운동선수로서 조언도 어린 제게 많이 주기도 했고요. 사촌형을 동경하던 저는 농구라는 운동에 빠지게 됐습니다. 매일 공부는 않하고 농구를 보고 하기만 했네요. 결국 농구가 너무 좋아서 농구계를 바꾸겠다는 다짐을 가졌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으로 가서 에이전트가 되겠다는 꿈이 생겼고요. 전교꼴등…그리고 초등학교 때부터 교육을 못 받은 저는 초등학교 1학년 수학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당연히 영어는 ABC도 겨우 알았고요. 막 중학교를 전교생 수백명 중 마지막으로 졸업을 했던 저는 고등학교를 못 들어갈 확률이 컸습니다. 하지만 어쩌다가 들어간 고등학교 하지만 자퇴를 하고 미국으로 생각 없이 오게 됐습니다. 고등학교 선생님들, 가족들, 친구들, 모든사람들이 너무 늦었다고 미친짓이라고 어머니께 뭐라고 했었네요. 저희 어머니는 저를 기다려주셨고 결국 마음을 잡은 제게 “나는 항상 너를 믿었어 그래서 공부 하라고 이야기 않했어.” 말씀해주셨네요.
저는 무작정 미국으로 넘어오게 됐고 매일 새벽 2시까지 공부를 하면서 좋은 성적을 유지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영어를 못해서 우연히 끌려가게 됐던 미식축구. 미식축구를 3년간 했고 대학을 들어갈 마음이 있었습니다. 졸업반 때 전학간 학교에서 은사님을 만난 후 제가 미식축구를 좋아하는게 아니라 팀이라는 개념을 좋아한다는 것을 배웠고요. 당연히 미식축구에는 목표가 없었습니다. 농구를 잊은지 오래 됐구요. 고등학교를 졸업을 하고 3년만에 보는 부모님 좋은소식을 가지고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그소년이였습니다.
하지만 한국에 방문 했을 때 뇌종양을 발견을 하게 됐습니다. 의사선생님이 제게 미국으로 돌아가지 말고 한국에 남으라고 하시더라고요. 암일 가능성이 있다고. 어머니도 의사선생님과 동의를 하셨습니다. 울면서의사선생님과 어머니께 평생 남들이 제게 불가능하더 했던 대학을 가게 됐는데 저는 절대 포기 못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과거의 상처들을 기억하며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지만 암판정을 기다리는 일주일간 많은생각들이 들었습니다. 만약 암이 아니고 기회가 다시 온다면 제게 주어진 숙제를 미국 돌아가서 해결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스포츠계를 바꾸는 것이죠.
다행히 암은 아니였고 아버지를 통해서 스포츠계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네요 하지만 스포츠계 고위직분들이 제가 야구부 때 구타를 당한건 다 이유가 있으니 맞은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실망이 컸던 저는 집에 돌아와서 생각을 다시 했습니다. 저는 제가 직접 운동선수가 돼서 어린선수들에게 예가 되어야 한다고 결정을 했습니다. 죽어도 하기 싫었던 운동계를 돌아오기로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우슷게 소리처럼 말하던 창던지기를 시작하게 됐네요.
대학 그리고 창던지기를 시작을 했을 때 많은사람들이 시간낭비를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불가능 하다고. 사람들이 까먹은부분이 있네요. 저는 너무 겪은일들이 많아서 모든 것들이 가능하다고 믿는사람입니다 그리고 제가 할 수 있다고 믿고요. 창던지기를 한번도 안해본 제가 1부 리그 대학으로 들어간다? 말도 안 되는 소리죠. 대학에서 성적을 잘 받는다? 불가능한 이야기죠.
2020년 12월 2년제 대학을 1년만에 졸업하게 됐네요 그리고 성적은 4점 만점에 3.6이라는 괜찮은 성적이고요. 그리고 2021 1월에 LSU (Louisiana State University)로 전학을 가게 됐습니다. LSU는 현재 NCAA 랭킹 1위팀으로 역사상 최고의 프로그램 중 하나입니다. 모두가 저에게 불가능 하다고 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한학기 정도 기다려야 할 수도 있지만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며 훈련했습니다. 혼자서 트레이닝을 하면서 1부 리그에 들어왔네 이제는 많은팬들도 생겼고 팬들이 적은 수천개의 댓글들을 하나하나 읽을 기회도 생겼고요.
외롭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많이 그립네요 하지만 제가 결정을 했던 일이고 한국에 다시 돌아가는 날 좋은소식을 가지고 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사촌형도 요즘 힘들어 하고 아버지도 국가대표 감독직을 다시 맡아 올림픽 금메달을 키우는게 꿈이네요. 사촌형이랑 아버지 그리고 저 모두가 최고가 되기로 했습니다.
아버지랑은 2024년에 올림픽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했네요. 아버지랑 저와 관계는 운동으로 시작이 돼서 운동 때문에 멀어졌지만 다시 가까워졌습니다. 저는 선수생활을 하면서 회계를 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은퇴 후 운동계를 평생 떠날 생각이고요.
제 이름은 Rei Park 입니다. 꼭 최고의 선수가 되어서 돌아올게요. 제게 꿈이라는 것을 키워주셨던 xxxx 정말 감사합니다. 다시 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