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애와 용기를 보여준 피 위 리즈
인간애와 용기를 보여주는 피 위 리즈의 이야기를 옮겨왔습니다.
사진이 잘 옮겨지질 않아 제가 임의로 갖다 붙였습니다.^^ (출처 : MLB nation)
그냥 평범해 보이는 이 장면은 미국 야구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꼽힙니다.
1947년 5월 14일 신시내티 레즈와 브루클린 다저스의 경기입니다.
당시 인종차별이 심했던 신시내티의 홈관중들이 엄청난 야유를 퍼부우며 재키 로빈슨을 비난하고 있을 때…
다저스의 유격수 피 위 리즈가 재키 로빈슨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하고서 웃으면서 얘기를 나누고 본인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순간 비난과 야유를 퍼붓던 관중석은 일순간에 조용해졌습니다.
심지어 그 선수는 신시내티에서 가까운 루이스빌 출신으로 신시내티에서도 인기가 많았던 선수…
이 선수는 다름 아닌 다저스의 리더였던 레전드 피 위 리즈입니다.
그는 1918 켄터키주의 에크론에서 태어나 8살때 인종차별이 심했던 루이스빌로 이사해 살았습니다.
고교시절 3학년때나 되서 야구를 시작한 리즈는 몸무게가 120파운드(약 54킬로)에 불과했습니다.
고교 시절 2루수로 단 6게임에 나온게 전부였습니다.
고교 졸업 후 리즈는 루이스빌 전화 회사에서 케이블을 연결하는 일을 하면서 야구는 교회 리그에서 뛰었습니다.
그의 팀은 마이너리그팀인 루이스빌 콜로넬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고 리즈에게 감명 받은 콜로넬스의 구단주 캡 닐은 그와 200달러에 계약을 맺었습니다.
1938년 리즈는 코넬스의 주전 유격수로 활약하면서 탑 유망주 중 한명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1939년 시즌전에 리즈에 대한 권리를 획득한 보스턴 레드삭스는 브루클린 다져스에 35,000달러와 리즈를 포함한 4명의 선수를 보내고서 투수 한명을 받아왔는데 이는 역사상 가장 일방적인 트레이드 중 하나로 남아있습니다.
1940년에 빅리그에 데뷔한 리즈는 발 뒤꿈치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해 84경기 출장에 그쳤으나 신인으로써 .272의 타율과 15개의 도루로써 주전으로 확실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2년차 징크스를 보낸 피 위 리즈는 .229의 타율이 무려 47개의 실책을 기록했습니다.
당시 월드시리즈에서 양키스를 상대로 .200의 타율로 부진했고 4게임에서 3개의 실책을 하면서 잊을수 없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때의 쓴 경험이 그에겐 보약이 됐고 1942년에 그의 10번의 올스타 중 첫 올스타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셔널리그 유격수 중 putouts과 어시스트에서도 1위를 기록했습니다.
그의 시대에 많은 선수들이 그랬든 그도 2차대전에 참전을 했습니다.
그가 빠진 1943년에는 리그 7위를 기록했습니다.
총 3년을 군복무로 빠진 리즈는 1946년에 복귀해 마지막까지 카디널스와 치열한 선두 경쟁을 벌여 동률로 끝나 플레이오프 승부를 벌였습니다.
이게 메이저리그 역사상 첫 타이브레이커 플레이오프입니다.
결국은 카디널스가 다저스를 꺾고 월드시리즈에 진출을 했습니다.
그렇게 맞이한 1947년 드디어 리즈의 강한 서포터이자 좋은 친구인 20세기 첫 흑인 메이저리거 재키 로빈슨을 만나게 됩니다.
리즈는 재키 로빈슨의 계약 소식을 군 복무시절에 들었습니다. 그는 흑인 선수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지 않았었고 오로지 그의 관심사는 재키 로빈슨이 니그로리그 시절에 본인과 같은 유격수를 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유격수를 보기에는 어깨가 약한 편이었던 재키 로빈슨이 첫시즌 1루수를 보게 되면서 리즈는 본인의 포지션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당시 팀내에선 재키 로빈슨이 합류하면 시합을 보이콧 하겠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몇몇 선수들은 브랜치 리키에게 청원서를 제출했는데 리즈는 그 청원서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리즈는 “재키 로빈슨이 내 포지션을 차지할 수 있다면, 그에게는 자격이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해 신시내티 원정에서 영화속에 등장한 바로 그 장면이 연출됩니다.
훗날 이 장면은 동상으로 만들어져 브루클린 MCU 공원에 세워져있습니다.
수많은 차별 속에서 적응해야 하는 로빈슨을 그 누구보다도 옆에서 서포트 하면서 적응하는데 도움을 줬던 리즈는 어떻게 보면 로빈슨의 도움을 받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로빈슨이 합류한 1947년은 팀의 리더이자 스타였던 리즈에게 집중될 견제가 로빈슨에게 분산되면서 .284의 타율에 리그 최다인 104개의 볼넷을 얻어냈고 본인 커리어 하이인 .426의 장타율을 기록했습니다.
그 다음시즌부터 재키 로빈슨이 2루수 자리를 보게 되면서 리즈와 로빈슨의 역사적인 키스톤콤비가 탄생하게 됩니다.
훗날 피 위 리즈의 장례식에서 또 다른 흑인 개척자인 조 블랙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피 위는 나의 어린시절 꿈이었던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에서 뛰는 것을 실현시켜주었다. 피 위가 재키 로빈슨에게 어깨동무한 순간 모든 니그로 리그의 선수들은 웃으며 처음으로 백인이 우리를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내가 브루클린에 왔을때 나는 피 위에게 가서 말했다. 흑인들은 당신을 사랑한다. 당신이 재키에게 다가갔을때 당신은 우리 모두에게 다가온 것이다. 당신의 유니폼에 있는 넘버1은 우리 마음속의 넘버1이다.”
은퇴 후에 그는 다저스 코치 생활을 했고 방송 해설자로써 커리어를 쌓았습니다.
재키 로빈슨에게 어깨동무를 했던 피 위 리즈는 훗날 ”로이 캄파넬라의 밤”에 로이 캄파넬라의 휠체어를 끌어주면서 다시 한번 역사적인 순간에 한장면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의 고향인 루이즈빌 슬러거 필드 구장 앞에는 항상 피 위 리즈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이유로 사람이 사람을 미워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이유가 피부색이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