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4등>과 <위플래쉬>

영화평론가 허지웅씨가 영화 <4등>과 <위플래쉬>를 연결해 감상평을 써주셨네요. <위플래쉬> 이 영화는 싸이코패스 영화로 인식되어 전세계적으로 그다지 흥행을 거두지 못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제자를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로 학대하는 플래쳐 교수의 모습이 ‘열정’이라는 코드로 해석되며 저예산 영화로는 나름 관객을 모았다고 하죠. 많은 강남의 부모님들이 자녀를 데리고 영화관을 찾았다는 기사도 나온 적이 있습니다. 영화를 만든 감독도 그 이야기를 듣고 뜻밖이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하던데요. 저는 <위플래쉬>같은 영화는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습니다.   
 

“매혹적인 영화들은 때때로 정작 말하고자 했던 비전과는 전혀 달리 엉뚱한 감상을 관객에게 전달하곤 한다. 이를테면 <대부>를 보고 마피아가 되고 싶다든지, <위플래쉬>를 보고 역시 천재는 다그쳐서 계발되고 만들어지는 거라고 생각한다든지 말이다. 플래쳐 같은 능력은 없으면서 플래쳐처럼 행동하는 것만 좋아하는 통제 환자들이 넘치고 차는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사실 <위플래쉬>는 전혀 반대의 이야기를 하는 영화다. 천재 소년이 기존의 규칙을 대변하는 악당 스승을 만나 그의 규칙을 따르고 닮아가다가 파멸할 뻔한다. 권위 있는 시니어가 ‘이기기 위해선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하고 그걸 가르치려고 노력하면서 손가락질을 당하는 나는 영웅이고 남들은 다 위선자다’라는 식의 말을 내뱉으면 누구나 혹하기 쉽다.

매를 든 선생님이든 군대 선임이든 회사 선배든. ‘폭력이 동원되더라도 강하게 통제하고 억압할수록 개인에게 동기가 생기고 세상은 더 잘 굴러간다’는 걸 겉으로 주장하는 사람은 요즘 드물다. 그러나 그게 내심 불편한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는 우리 사회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4등>의 호쾌한 점은 소년이 이 모든 걸 이겨내는 과정에 있다. <위플래쉬>의 주인공처럼 스승에게 압도되고 그를 닮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소년은 결국 경쟁 자체를 부정하지도 않으면서 경쟁에서 이기고 성장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해낸다. 보통 부조리한 세상과 이상을 좇는 개인을 연결할 통로가 되어준답시고 대단한 현자처럼 구는 사람들은 무슨 굉장한 진리를 설명하듯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한다. “너 힘들고 좆같은 거 알아, 그런데 이게 세상이야, 나라고 나쁜 사람 되고 싶어서 이러겠니? 니 눈에는 한심한 어른으로 비쳐지겠지, 하하하(고개를 약간 기울인 쓴웃음)…. 너는 잘될 거야, 일단 영리하게 굴자.” 소년은 그런 플래쳐의 논리, 앞선 세대의 노하우, ‘세상의 태도’와 타협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 힘으로, 자기만의 동기를 가지고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런 점에서 영화 <4등>의 가장 빛나는 순간은 마지막 장면이 아니다. 이 영화의 가장 빛나는 순간은 코치가 남긴 선물을 소년이 집어들지 않는 장면이다. 소년은 부조리한 질서로부터의 어떠한 유산도 이어받기를 거절한 것이다. 올 상반기 가장 감동적인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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