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초의 승부
“10초의 승부”
(야구친구 http://www.yachin.co.kr/w/73/30 )
1대0의 살얼음같은 리드를 잡고 있던 8회말, 2사2루의 위기상황에서 서울디자인고등학교의 최정기 감독이 마운드에 올라온다. 다음 타자는 1학년 때 이미 5개의 홈런을 치며 괴물타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서울고의 4번타자 강백호. 지난 2년 동안 승리가 없었던 신생팀으로서 간절했던 첫 승을 눈 앞에 둔 상황. 경기를 지켜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1루를 채우고 다음 타자와 승부하리라 예상한다.
하지만 감독은 에이스의 자존심을 선택한다. 엘리트 중학교 야구부가 아닌 쥬니어 야구팀 출신으로 같은 길을 가고 있는 후배들의 희망이 된 소이현 선수는 전통의 명문고 4번타자를 향해 가운데로 공을 꽂아 넣는다. 묵직한 패스트볼에 강백호 선수의 배트가 조금 밀리며 공은 내야를 향해 굴러가고, 야속하게도 타구는 유격수와 3루수 사이를 빠져나간다. 서울고 응원석에서는 박수와 함성이 흘러나오고 2루 주자는 3루를 찍고 지체없이 홈으로 내달린다.
디자인고의 창단 첫승이 그렇게 물거품이 되나 싶은 순간, 좌익수 전영수 선수가 자신의 앞으로 굴러온 공을 잡고 온 힘을 다해 홈으로 뿌린다. 공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포수의 가슴에 꽂히고, 간발의 차로 주자를 잡아낸다. 불과 10여 초만에 양 팀의 덕아웃과 응원석은 희비가 엊갈린다. 소이현 선수는 9회에도 마운드에 올라 140km대의 묵직한 패스트볼과 빠르게 꺾이는 슬라이더로 서울고 타선을 막아내며 팀에 창단 첫승을 안긴다.
MBC청룡의 원년 멤버 출신으로 동국대학교 승가학과에 입학하며 불교와 인연을 맺은 디자인고 최정기 감독은 선수 시절부터 틈날 때마다 108배를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고 전해진다. 남양주에 있는 불암사의 스님들과 함께 불일(佛日)야구단을 만들어 활동할 정도로 독실한 불교신자로 알려져 있는 최정기 감독은 소이현과 강백호의 승부를 앞두고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시공간으로 빠져든 듯하다.
그는 ‘오직 지금 이 순간 뿐’이라는 불교적 세계관에 따라 승리에 대한 염원과 점수를 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모두를 뛰어넘는 선택을 했다. 그런 것들 모두가 마음이 빚어낸 장난이라는 것을 꿰뚫은 결정에 야구의 신은 드라마틱한 장면을 선물했고, 경기를 지켜본 사람들은 두고두고 저마다의 기억으로 추억할 이야기를 간직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