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선수에게 숫자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우리야구 7/8월호에 소개된 토아일당님의 칼럼입니다.
몇 해 전, 한국야구학회 컨퍼런스에서 이지풍 코치(당시 넥센 히어로즈 트레이너)의 인상적인 발표를 들은 적이 있다. 팀 타자들이 BABIP(삼진, 볼넷, 홈런을 제외하고 수비할 수 있는 인플레이 타구 중 안타가 된 비율, 보통 바빕이라고 읽다)이라는 야구통계 지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틈틈이 분석팀을 통해 자신의 BABIP 숫자를 확인 한다는 것이다.
세이버 매트릭스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준 BABIP
BABIP는 2000년대 초반 보로스 맥크라켄이라는 분석가가 처음 제시한 아이디어다. 길게 설명하자면 한없이 복잡한데 간단히 요약한다면 볼넷, 삼진과 달리 타자의 배트에 맞아 페어그라운드로 날아간 타구가 안타가 될지 아웃이 될지는 운이나 수비에 휠씬 더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최고의 투수나 평균 이하의 투수나 일단 타자가 때려서 인플레이 상황이 되면 그 결과에서 큰 차이가 생기지 않는다는 뜻도 된다.
BABIP의 아이디어는 당시 분석가 사회에서조차 너무 새롭고 낯설었기 때문에 굉장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면밀한 검토 끝에 실제로 그렇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세이버 매트릭스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분석가나 통계를 즐기는 골수팬들에게야 흥미 진진한 스토리지만 실제로 그라운드에서 공을 치고받는 야구선수에게 이게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걸까.
들어보니 내용이 이랬다. 선수들은 늘 하루하루의 컨디션과 성적에 압박을 받는다. 몇 경기 연속으로 무안타 게임을 하고 나면 자신의 타격 폼에 문제가 생긴 것인지, 슬럼프에 빠진 건 아닌지 고민이 시작된다. 고민은 심리적 되먹임을 만들며 더 깊은 슬럼프로 이끌 수도 있다.
당시 히어로즈 타자들은 그럴 때 자신의 BABIP을 물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최근 경기 BABIP이 평소보다 많이 나빠져 있다면 그것은 운이 나빴거나 상대 수비가 좋았던 것이기 때문에 너무 많이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한편, BABIP을 높이는 것은 결국 더 강한 타구를 때리는 것이기 때문에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충분한 휴식을 취하려 했다는 것이다.
분석적으로 본다면 디테일에 이런저런 오류가 있음에도 큰 맥락에서 히어로즈 타자들의 접근은 합리적이다. 야구 경기 안에서 결과를 만드는 것은 결국 선수들이지만, 그 과정에서 선수가 스스로 통제하고 책임질 수 있는 영역과 그럴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구분되기 때문이다.
비슷한 사례는 최근 메이저리그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여러 게임 동안 드러난 기록만으로는 극심한 부진에 빠진 타자들이 타구 속도, 타구 각도를 확인한 후 그것이 평소 자신의 숫자와 비슷하다면 변화를 주기보다는 오히려 평소 루틴을 더 철저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하필 잘 맞은 타구가 야수 정면으로 날아간 것 뿐이라면 타격 폼이나 타석 전략을 바꾸려는 시도야말로 훨씬 더 위험하고 해로울 것이다.
숫자, 마법은 아니지만 객관적 지식을 얻을 수 있어
투수에게도 마찬가지다. 1점 차 상황에서 마운드에 올라 연속안타를 맞고 경기를 망친 선수에게 “괜찮아. 잊어버려. 다음에 잘하면 돼”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게 얼마만큼이나 공감될 수 있을까. 하지만 방대한 데이터 분석으로 밝혀진
것은 게임에서 나오는 안타 중 절반 이상이 그저 수비수가 없는 곳으로 운 좋게 날아간 평범한 타구라는 점이다. 경기를 망친 투수가 그걸 이해하고 있다면 스스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원하는 곳으로 제구를 했고 의도한 대로 타이밍을 빼앗았다. 하지만 신이 아닌 이상 타구의 코스까지는 어쩔 수 없다. 난 그저 내가 던질 수 있는 최선의 공을 던졌다. 결과가 패배일 뿐이다.”
당연하게도 숫자는 마법이 아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야구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야구는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 ‘멘탈 게임’이다. 그런데 이 멘탈 게임을 “자신을 믿어라”와 같은 주문으로 늘 이겨낼 수 있을까? 때로는 그라운드 안에서 일어난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이 필요하다. 숫자가 마법을 부릴 리는 없다. 하지만 야구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이해하는 것을 도와준다. 또 선수가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영역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반대로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통제해야 하는 부분에 더 집중하도록 도울 수 있다.
야구는 선수가 한다. 그리고 선수가 ‘야구’를 한다. 그렇다면 야구선수가 자신이 하고 있는 그 ‘야구’를 더 깊이 있게 다양한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은 플레이를 하고, 더 나은 선수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안 될 리가 없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