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야구 사랑하시죠? (이딴게 내 응원팀이라니 12편)
지역에 거주하면서 연고 구단이 아닌 다른 구단을 응원한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특히 부산에서 나고 자라 살면서 롯데 자이언츠를 응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특정 집단에게는 일종의 ‘반역 행위’ 로까지 받아들여진다.“마, 야구를 안 보면 안 봤지. 부산은 롯데 아이가!” 사직구장을 가득 메운 롯데 팬들의 압도적인 함성 속에 3루 원정석에 조그만 섬처럼 자리한 원정팀 응원단의 존재는 얼마나 초라한지! 경기 후반, 승패와 관계없이 모든 관중이 남녀노소 하나가 되어 목놓아 부르는 ‘부산 갈매기’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듣고 있으면 나 같은 ‘롯데 팬 아닌 부산 사람’은 ‘사직 노래방’ 한가운데서 한없이 고독해지고 마는 것이었다. 아, 물론 내 응원팀이 홈 팀을 압도하면서 일순간 모든 응원이 잦아들고 사직구장이 ‘사직 독서실’로 바뀔 때의 쾌감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말이다.
‘롯데 팬 아닌 부산 사람’과 ‘키움 히어로즈 팬’ 이라는 이중의 비주류 정체성(?)으로 살다 보니(키움 히어로즈는 10개 구단 중 팬이 가장 적기로 유명하다…….) 지역이나 집단에 대한 소속감, 일체감 같은 것과는 개인적으로 담을 쌓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한 발 나아가 스포츠 팬덤이 주로 생산하고 소비하는 그런 정동들을 촌스럽다고 느끼기까지 했던 것 같다. 대한민국 4대 프로스포츠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리그를 소비하면서 이런 말을 늘어놓는 게 겸연쩍긴 하지만 아무튼 내게 있어 스포츠 관람은 공동체와 하나되는 경험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활동에 가까웠다.
그러나 야구가 없던 비시즌 기간 동안 여자프로농구에 빠져 지내면서, 지금까지와는 많이 다른 경험을 했다. 부산 연고 팀인 BNK 썸을 응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직체육관에서 정규시즌 몇 경기를 직관하며 응원팀을 저울질하다 BNK 썸이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후반에 폭발하며 15점차 역전승을 따낸 경기를 직관하고 돌잡이를 하듯 운명적으로 ‘팀 잡이’를 하게 되었다. 나를 포함한 관중석의 앞뒤좌우 사람들이 모두 같은 지점을 바라보고, 같은 목표를 향해, 같은 의지와 열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전율과 감동이 있었다. 그리고 이소희의 3점슛이 터지면서 점수차가 벌어지는 순간 사직체육관이 떠나가라 목청 터지게 불렀던 ‘부산 갈매기’의 맛이 잊혀지지 않았다. 아, 이것이 홈 팀을, 연고 팀을 응원하는 재미인 걸까? 생소하고도 벅찬 경험이었다.
그런데 스포츠 팬도, 부산 시민도 아닌 친구에게 비주류가 아닌 ‘주류’의 짜릿함을 처음으로 느껴 보았다고 설명하며, 이 경험을 들려주었더니 예상치 못한 반응이 돌아왔다. 친구는 말 그대로 ‘빵 터지며’ 한참을 웃었다. 그러더니 덧붙이는 것이었다. “아니, 도대체‘부산 갈매기’를 왜 불러요?”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아차, 내가 애초에 ‘전지적 스포츠 팬 시점’ 그리고 ‘전지적 야구 팬 시점’으로 말하고 있었구나. 일반인들은 스포츠 경기장에서 ‘부산 갈매기’를 왜 부르는지 이해를 못 하는구나.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스포츠/야구를 중심으로 사고하지 않는구나…….
팬fan은 광신자fanatic에서 비롯된 표현으로, 지금은 정치, 대중문화 등으로 범위가 확장되었지만 원래는 스포츠 팬만을 가리키는 의미였다고 한다. 스포츠 팬들의 충성도가 얼마나 높은지를 알려주는 단어다. 만우절이었던 지난 4월 1일, 2023년의 프로야구가 개막했다. 롯데 서준원의 미성년자 상대 성범죄 혐의 기소, 장정석 KIA 전 단장의 FA 뒷돈 요구 논란, KBO리그 사무국 중계권 관련 배임 혐의 압수수색, 수도권 팀 야수 불법도박 신고 등 ‘거를 타선이 없이’ 온갖 사건사고를 겪은 다음의 일이었다. ‘거짓말’ 같은 사실은, 그럼에도 구름 관중이 야구장을 찾으며 역대 최초 5개 구장 개막전 매진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나 역시 야구 뉴스들을 훑으면서 이게 야구 기사인지 사회면 기사인지 구분이 안 된다고 온갖 욕을 퍼부었지만, 그럼에도 오후 두 시가 되자마자 야구 중계를 틀었다.
아무리 리그에 악재가 터지고, 응원팀이 야구를 못하고 속을 썩여도 ‘미워도 다시 한 번’프로야구를 사랑하는 팬들이 아직은 이렇게 많은 것이다. 마치 이렇게 질문하듯이.
“그래도 야구 사랑하시죠?”
그럼에도 참아줄 수 없는 ‘선을 넘는’ 순간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잊지 않길 바란다, 그 열정적인 ‘사직 노래방’에도 단 69명만이 자리를 채웠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늘어만 가는 노동시간을 견뎌내며 초 단위의 자극을 추구하는 틱톡과 쇼츠(shorts)의 시대, 3시간이 넘는 공놀이를 붙들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를.
작가 소개 : 구슬
KBO리그와 히어로즈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언제 망하는지 두고보자며 이를 갈게 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