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영화가 아니라 다큐다 (어느 현역 베테랑 투수와의 대화)

뉴스레터 16호 ‘코치라운드 생각’입니다. 현역 투수 한분과 나눈 이야기를 담아보았습니다.

​KBO리그의 베테랑 투수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피칭에 관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에 ‘실제 경기에서 투수가 갖는 마인드셋’으로 대화의 주제가 이어졌습니다. 경기에서 자신이 평소에 던지던 수준 이상으로 구위를 끌어올리려고 애쓰는 선수들이 많이 보인다는 이야기를 제가 꺼냈고, 이와 관련하여 무척 재밌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구위를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예. 더 빠른 공을 던지기)은 불펜피칭이나 트레이닝을 통해 하고, 실제 경기에서는 피칭전략에 집중하는 것, 즉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을 효과적으로 실천하는 것(예. 어느 타자를 상대로 어디로 던질 것인가)이 맞지 않냐는 의견을 제가 냈는데요.

​그 말을 들은 베테랑 선수는 “선수들이 영화나 만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래요. 영화가 애들 다 버리고 있어요.” 이렇게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 말에 담긴 의미가 순간적으로 확 와닿아서 물개박수를 치며 한참을 같이 웃었습니다.

​”영화를 보면 그러잖아요. 안타를 맞거나 볼넷을 계속 내주면서 자신감이 떨어진 투수한테 감독이 올라와서 한 마디 하죠. 너는 최고라든지, 뭔가 가슴뭉클한 이야기를 해요. 그렇게 자신감을 막 불어넣죠. 그러면 방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투수가 되어서 불같은 강속구로 삼구삼진을 잡아요.”

순간적으로 일어난 각성의 순간을 통해 삶이 바뀌는 신데렐라 스토리나 영웅신화는 소설이나 드라마의 오랜 포맷입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서사이기도 하기에 뻔한 결말인 줄 알면서도 빠져들어가곤 합니다. 하지만 경기장에 들어서는 선수가 그런 낭만적인 서사에 빠져서는 곤란하다는 뉘앙스로 베테랑 선수는 말했습니다. 마치 버튼을 누르면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처럼 마운드에서의 능력도 그렇게 버튼을 누르면 올라간다고 여기는 선수들이 실제로 많다면서요. 오히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태도가 선수에게는 필요하다고 하며 다음과 같은 뼈있는 농담을 남겼습니다.

​”영화에는 주인공이 있잖아요. 그런데 현실에서는 경기장에 있는 모두가 주인공이죠. 선수들은 영화가 아니라 다큐를 많이 봐야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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