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야지’에 대해

봉황대기 준결승을 TV로 본다. 관중석에 사람이 없다보니 선수들의 응원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유심히 들어보니 자신의 팀에 대한 응원구호보다 상대 선수의 신경을 건드리기 위한 야유가 대부분이다. 아이들 하는 말로 ‘야지를 까는’ 것이다. 상대가 에러를 하거나 볼넷을 내주면 “뭐해?”, “땡큐!”같은 말로 상대팀 선수의 수치심을 자극한다.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다. 조롱과 비아냥은 일베의 코드 아닌가? 경기장 밖에서는 파렴치한 모습으로 간주되는 행동이 경기장 안에서는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문득 올림픽같은 국제대회에 나가 우승을 차지한 우리나라 선수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치열한 승부 끝에 극적으로 이기고 나면 동료들과 부둥켜 안고 기쁨을 나눈다. 얼마나 힘들게 훈련을 했는데 아마도 정신을 잃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바닥에 쓰려져 있는 상대 선수에게 다가가 등을 두드려주거나 손을 내미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 LPGA의 우리 선수들은 챔피언 퍼팅이 끝나기 무섭게 그린으로 달려가 샴페인을 터뜨린다. 함께 4시간 이상을 돌며 자신의 승리에 멋진 조연이 되어준 파트너 선수는 옆에서 어색한 표정으로 서있다. 가벼운 포옹 정도는 나누고 축하를 나눠도 될텐데 그게 잘 안되나보다.

아이를 운동시키며 조금은 짐작되는 부분이 보인다. ‘야지’를 까는 아이들의 마음을 읽어본다. 야지를 당하는 선수, 즉 실수를 한 선수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닿는다면 그렇게 약올리고 조롱하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상대의 감정에 반응하는 것의 출발은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느끼고, 표현하고, 인정받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렇지 못하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에너지를 쓰고 있을 때 주변을 돌보기는 어렵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운동부는 여전히 일방적인 문화다. 선수 개개인의 욕구보다는 규칙과 규율이 우선시된다. 실력향상과 승리라는 지상과제 앞에 아이들의 감정과 욕구는 쉽게 무시되곤 한다. 어쩌다 감정을 드러냈다가는 호된 질책을 받기도 한다. “운동하는 놈이 그렇게 약해 빠져서야.” 가끔씩 경기에서 지거나 실수를 했을 때 받는 처벌은 더더욱 자신을 방어하는데 몰두하도록 만든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근육이 힘을 잃듯이 어린 나이부터 이런 경험들이 반복되며 주변 사람들과 공명하는 감각은 죽게 된다.

이런 이야기를 아들녀석에게 하니 ‘야지 좀 깔 수도 있지 별 것도 아닌 걸로 아빠가 흥분하고 있다’는 표정이다. ‘다른 사람의 불행 위에 자신의 행복을 쌓지 말라’는 석가모니의 말씀도 들려주었지만 쉽게 동의가 되지 않는 낌새다. 새로운 과제가 하나 주어졌다. 이미 많이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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