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야구

일본 야구가 버리고 있는 낡은 것들을 ‘한국적인 야구’라는 이름으로 껴안으려는 태도는 어리석다. ◑ 최민규

구와타 마스미씨를 처음 만난 때는 2008년 5월이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에이스였던 그는 앞선 2007년에 메이저리그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서 한 시즌을 보내고 은퇴를 선언한 상태였다. 야구에 진심인 사람이었다. 선입견과는 다른 점도 있었다. ‘구와타 로드’는 한국 언론에도 자주 소개됐던 단어다. 구와타씨는 1995년 팔꿈치를 다친 뒤 토미존 수술을 받았다. 가와사키 소재 요미우리 2군 구장에서 재활에 매달리며 매일 러닝을 해 잔디가 말라 길이 났다고 한다. 국내에선 일본야구 특유의 강훈련을 상징하는 단어였다. 하지만 직접 만난 구와타씨는 트레이닝 철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훈련을 너무 많이 하지도, 너무 적게 하지도 않는 것이다. 중요한 건 균형”이라고 답했다. 토미존 수술 뒤에도 구속을 되찾지 못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혹사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고교 시절 고시엔 대회에서 4~5일 연투를 했다”고 말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와세다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오사카 PL고교 3학년 때 와세대대 진학 대신 요미우리 입단을 택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가 2009년 와세다대 대학원에 진학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희망을 이룬 것 같아 응원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중에 그가 쓴 석사학위 논문을 구해 읽었다.

충격이었다.

제목은 ‘야구도(野球道) 재정의에 따른 일본야구계의 발전정책에 대한 연구’. 일본 야구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논문은 일본에서 야구가 이데올로기화한 과정을 추적한다. 야구는 2차 대전 적성국이던 미국의 스포츠였다. 자칫 야구가 사라질 위기에서 일본 야구인들은 정부와 군부의 입맛에 맞는 야구관을 만들었다. 논문 제목에 나오는 ‘야구도’다.

구와타씨는 야구도의 특징을 ‘연습량 중시’, ‘정신 단련‘, ’절대복종‘ 세 가지로 집약한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성립된 야구도가 현재와 미래 일본 야구의 이념이 돼서는 안 된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연습량 중시’는 ‘연습질 중시(Science)’, ‘정신의 단련’은 ‘마음의 조화(Balance)’, ‘절대복종’은 ‘자신과 타인에 대한 존중(Respect)’으로 재정의돼야 한다고 했다.

논문을 읽은 뒤 ‘구와타씨는 교진(巨人)으로는 돌아가기 어렵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구와타씨는 대학원 졸업 뒤에도 언론 등에서 활발하게 일본 야구를 비판해왔다. 일본 사회는 보수적이며 ‘와(和)’를 중시한다. 튀는 주장을 하는 반골은 경원시된다. 일본 야구도 보수적이며 요미우리는 가장 일본적인 프로야구단으로 꼽힌다.

이 생각은 틀렸다. 구와타씨는 2021년 투수코치로 요미우리 구단에 복귀해 올해인 2024년엔 2군 감독을 맡고 있다. 일본프로야구(NPB)는 2010년대 이후 질적으로 뚜렷한 발전을 했다. 양대 리그 중 퍼시픽리그가 변화를 선도했고 센트럴리그도 변화에 동참하고 있다. 구와타씨의 요미우리 복귀가 시사하는 점이다. 2023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우승은 지금 일본야구의 성취를 잘 보여준다.

이 대회에서 한국 국가대표팀은 1라운드 탈락이라는 고배를 들었다. 언론과 야구계에서는 자성론이 일었다. 대형 국제대회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면 늘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핀트를 잘못 맞췄다’는 느낌을 받은 주장도 보였다. 대표적으로는 “이제 한국식 야구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후발 주자인 한국 야구가 선진 야구의 장점을 흡수해 발전해 온 역사에 눈을 감은 듯했다. 한국 야구도 가시적이든 그렇지 않든 과거와 달라진 점이 많다. 어떤 주장들에선 골치 아픈 변화를 거부하고 ‘좋았던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는 퇴행마저 느껴졌다. ‘학생 야구에서 규율이 흐트러졌다’는 식의 시대착오적인 주장도 있다. 그런데 정작 한국 야구에 ‘한국적’인 게 과연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딱히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한국 야구는 미국인 선교자 필립 질레트에 의해 시작됐다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식민지 시대에는 일본 야구의 압도적인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해방 이후에도 간접적인 영향력은 계속됐다. 구와타씨의 ‘야구도’ 비판은 일본 야구의 영향을 받아왔던 한국 야구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일본은 2006년과 2009년 WBC에서도 우승을 차지했지만 당시에는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지금처럼 100% 가까운 컨디션으로 뛰지 않았다. 2000년대 일본 야구는 국제대회에서 한국과 자웅을 가리기 어려운 접전을 치렀다. 하지만 프로 레벨에서 지금 양국간 차이는 1990년대 수준 정도로 벌어졌다.

일본 야구는 어떻게 달라질 수 있었을까? 『한국야구의 원류』를 집필한 오시마 히로시 작가는 아마추어 지도자들의 변화를 이유 중 하나로 들었다. 그는 “과거 일본 지도자들은 투수에게 러닝을 가장 중시하는 등 자기 경험에 기반한 주먹구구식 지도를 했다. 지금은 웨이트 트레이닝과 과학적인 훈련법을 강조하는 추세다. 제구력 중시 관점에서 탈피해 어린 투수에게 마음껏 던져보라고 말하는 지도자가 늘어났다”고 했다.

아마추어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났다는 견해에는 타당한 면이 있다. 일본 야구의 발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는 투수 구속이다. 2014년 일본프로야구(NPB) 포심패스트볼 평균 구속은 시속 141.5km였다. 한국의 KBO리그는 시속 141.0km로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지난해에는 NPB 시속 146.6km, KBO리그 시속 143.8km로 시속 2.8km나 차이가 났다. 구속 상승은 한 두 개 구단이 아닌 12개 구단 모두에게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경향이다. 프로뿐 아니라 대학과 사회인 야구에도 시속 150km를 던지는 투수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늘어났다. 2023년엔 대학에 73명, 사회인 야구에는 91명이었다. 이런 규모의 전방위적인 변화라면 ‘뿌리’에 해당하는 아마추어 야구에서부터 뭔가가 일어났다고 봐야 한다.

모리바야시 다카히코 게이오기쥬쿠고교 야구부 감독은 일본 야구의 변화를 상징하는 지도자 중 한 명이다. 그는 2023년 12월 코치라운드가 주최한 강연에서 “일본 야구의 낡은 가치관과 싸우고 있다. 집단에 자기를 맞추는 동조 압력, 변화에 소극적인 구태의연함, 지도자와 선수, 선배와 후배 사이의 상명하복과 절대복종,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익숙한 것을 따르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 야구는 달라지고 있다. 일본 야구가 버리고 있는 낡은 것들을 ‘한국적인 야구’라는 이름으로 껴안으려는 태도는 어리석다. 이 책은 현직에서 고교야구 선수들과 호흡하고 있는 모리바야시 감독이 일본 야구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변화를 추구하는지를 다루고 있다. 한국 야구계에서도 널리 읽혀야 할 책이라고 확신한다.

한국야구학회 최민규 이사님의 『씽킹베이스볼』 추천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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