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치의 권위를 내려놓으면 권위는 더 커진다
박찬호 선수의 인터뷰인데 새겨들을 만한 내용들이 꽤 많습니다. 아래는 제가 인상깊었던 대목만 옮긴 것이고 전문을 보시려면 링크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출처 : 네이버 매거진S 박동희 칼럼)
다시 이야기를 돌려서 잠실구장을 방문했을 땐 어떤 기분이었습니까.
대단함 그 자체였죠. 박동희 선배 투구하는 것도 직접 봤고. 그런데 다저스타디움은 ‘대단함’의 차원이 달랐어요. 그때 처음 ‘나도 저 마운드 위에서 던지고 싶다’는 생각과 그 마운드에서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삼진으로 처리하는 절 상상했어요.
한마디로 다저스타디움에서 꿈을 키운 셈이군요.
꿈을 키웠다기보단 그저 상상한 거죠. 그거 아세요? 꿈은 상상력에서 생기는 거예요. 상상력이 조금씩 깊어질 때 비로소 꿈이 만들어져요. 다시 꿈이 깊어지면 목표가 만들어집니다. 마지막으로 목표가 만들어지면 그때부턴 몸과 마음이 만들어져요.
사실 당시 한국 아마추어 야구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다는 건 정말 상상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상상은 반드시 그걸 이룰 때만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에요. 상상은 그저 상상일 뿐이에요. 정작 상상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에요. 상상에서 창의적인 사고가 나오기 때문이에요. 제가 만약 그때 메이저리그 진출을 구체적 목표로 삼고, 그걸 꿈으로 키우기로 작정했다면 아마 전 이 자리에 설 수 없었을지 몰라요.
상상의 단점은 금방 잊힌다는 데 있습니다. 목표와 꿈처럼 구체적이지 않기 때문에 ‘생각의 유통기한’이 짧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죠. 뭔가를 상상하면 그걸 글로 남기든 사진으로 남기든 증거를 남겨놔야 해요. 그래야 주기적으로 상상할 수 있으니까요. 제겐 다저스 점퍼가 증거였어요.
다저스 점퍼요?
(고갤 끄덕이며) 경기 끝나고 다저스타디움 선물 가게에 들렀어요. 제가 미국에 올 때 공주고 야구부 친구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줬거든요. 그래서 뭔가를 사가야 했어요. 그런데 제 눈에 다저스 점퍼가 ‘딱’ 들어오는 거예요. 속으로 고민했죠. ‘저걸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웃음).
그래 어떻게 했습니까.
정말 제가 나쁜 놈이었어요(웃음).
아이고.
200달러 주고 그걸 샀어요. 그리고 입었죠. 아, 좋죠(웃음). 친구들 생각에 걱정은 돼도 진짜 입을 때마다 다저스타디움에서 뛰는 절 상상하게 되더라고요. 다행히 서울에 왔을 때 한양대 이종락 선생님이 용돈을 주셔서 그걸로 친구들 선물을 살 수 있었어요(웃음).
(중략)
찬호 씨는 어떻게 영어를 독학하게 된 겁니까.
(강한 어조로) 간절했으니까요. 제가 실수하면 당장 공격이 들어왔으니까. 왜 그렇지 않겠어요? 내 경쟁자 약점이 영어를 못하는 거라면 당장 그쪽으로 공격해 들어오지 않겠어요? 분명한 건요. 영어를 잘하든 못하든 나 자신이 성장하고, 성공하려면 내가 속해 있는 사회의 문화를 알아야 한다는 거예요. 그걸 알려면 방법은 하나뿐이에요. 영어예요.
동감입니다.
가령 ‘굿(Good)’이란 말이 있다고 쳐요. 누가 저한테 ‘굿’ 그랬어요. 통역이 “이 사람이 좋대”하면 제가 “좋대?”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진짜 상대방의 감정을 느끼려면 ‘굿’을 제가 알아들어야 해요. 그러면서 사람들과 섞이는 거예요.
네.
정말이에요. 섞이지 않으면 내가 실수했을 때 정말 힘들어요. 가시방석이 따로 없어요. 그러나 느끼는 순간 우린 가족이에요. 그러면 실패해도 다음에 또 기회가 찾아와요. 미국이나 일본 무대를 밟는 선수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그거예요. ‘성적을 내기 위해 죽어라 던지기만 해선 한계가 있다’라는.
(중략)
‘야구 개척자’로서, 한국인 1호 메이저리거로서, 류현진의 한화·다저스 선배로서 ‘후배 류현진’에게 들려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그게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현진이 스스로 자신을 컨트롤하는 게 중요해요. 주변에서 ‘뜨거운 물’이라고 해도 난 ‘찬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배짱이 필요해요. 현진이는 잘 할겁니다. 주위에서도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봤으면 좋겠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시각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를 들어 현진이가 1회 홈런을 맞았다 쳐요. 주변에서 다들 지적해요. 그 순간 그게 징크스가 되는 거예요. 그걸로 자꾸 공격하고.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세상에 홈런 안 맞는 투수가 어딨겠어요? 거기다 현진이가 1회 홈런 맞았던 경기에서 못했나요? 아니에요. 다 잘했어요. 홈런을 맞았기 때문에 더 잘 던질 수 있었다는 뜻이에요. 만약 1회 홈런 맞은 걸 비난하거나 지적하는 대신 ‘아, 홈런 맞아서 더 잘 던졌구나’ 이렇게 바꿔 생각하면 다른 선수들에게 전달해줄 수 있는 메시지가 상당히 큽니다. 바로.
바로?
‘아, 홈런 맞았다고 포기해선 안 되구나’ 이렇게 긍정적 생각으로 투구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한국야구를 직접 체험하면서 1회 홈런 맞고서 자포자기하는 선수들을 꽤 봤어요. 감독, 코치님들이 뭐라고 하시니까. 투수 입장에선 그게 두려우니까 더 빨리 포기하는 거겠죠. 제가 지도자고, 현진이가 1회에 홈런 맞았다면 전 그럴 거예요. “왜 하나 더 맞지?”(웃음).
그런 의미에서 찬호 씨가 지도자가 되면 우리가 좀체 볼 수 없었던 코칭이 나올 것 같습니다.
메이저리그나 마이너리그 코치들은 선수에게 계속 질문을 던져요. 자기들이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없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알려주십시오.
코치가 이야기해줘서 선수가 깨닫는 건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미국생활 초창기 때 영어도 못하는 제게 계속 코치가 질문을 던졌어요. 처음엔 거짓말을 했죠. 어려운 상황을 빨리 모면하고 싶었으니까요. 그런데 다음엔 거짓말을 못 했어요. 왜냐? 내가 진실을 아니까. 반성했죠. 나중엔 진실만 이야기했어요. 그런 성장 과정을 마치니까 뭐가 생기더라고요. 그게 뭔지 아세요?
글쎄요.
용기였어요. 선수는 용기가 있어야 해요. 용기가 있는 선수는 절대 건성으로 “네, 네”하고 대답하지 않아요. 왜 일부 지도자분들은 투수가 조금만 못 던지면 그러잖아요. “야, 뭐하냐?”라고요. 그때 “네, 네” 해선 안 돼요. 왜 내 투구가 나빴는지 자세히 묻고, 자기 생각을 바르게 전달해야 해요.
음, 만약 어떤 투수가 던지다 맞았어요. 그 선수가 “코치님이 속구 던지라고 해서 속구 던졌는데요”했다고 치죠. 이때 일부 지도자분들은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야, 그게 아니고, 이런 속구를 던지라”고(웃음). 만약 그 지도자가 “내가 미안하다. 그래도 조금만 낮게 던져라” 이렇게 오히려 자길 낮춘다면 그 선수는 엄청나게 성장할지 몰라요.
제가 10년 넘게 야구전문기자로 살면서 터득한 한국야구의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감독, 코치 이기는 선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선 선수가 감독, 코치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걸 ‘항명’, ‘불경’으로 낙인 찍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그걸 좋게 받아들이는 지도자도 많지만요.
지도자의 ‘미안하다’는 표현이 자칫 권위 추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도 꽤 많습니다.
박 기자님.
네.
권위는 추락할수록 더 올라가는 거예요. 어린 새가 하늘을 날 때 처음부터 엄마처럼 큰 날개로 비행하진 않아요. 시간이 흐를수록 자꾸자꾸 날개가 커지면서 더 강하고, 높게 나는 겁니다. ‘지도’도 마찬가지예요. 스스로 권위를 내려놓으면 놓을수록 권위는 더 커집니다. 왜냐? 그렇게 하면 상대 마음이 열리니까.
좋은 말이군요.
일방적인 ‘주의’와 ‘지시’는 상대 마음을 더 닫히게 할 뿐이에요. 미국야구계에선 코치들이 베테랑 선수들을 상대로 끊임없이 질문하고, 자신들도 배워요. 그래요. 여기선 가르치는 게 아니라 공유하는 게 코치 역할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전 박 기자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제 말 속에서 뭔가를 또 깨닫고 있어요. 전 이게 소통이라고 봐요. 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느끼는 것도 소통이지만, 자신과 대화하면서 스스로 느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소통이라고 생각해요.
(중략)
아, 찬호 씨는 요즘 야구계보다 명상계에서 더 유명한 것 같습니다. 명상은 언제부터 한 겁니까.
다저스 때부터 했어요. 사람이 뭔가를 깨닫는 시기는 정말 어렵고 힘들 때가 아닐까 싶어요. 다저스에서 허리가 아팠을 때 처음 명상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땐 그래도 잘했으니까 아주 열심히 했던 건 아니었어요. 텍사스로 오고 나서 명상의 깊이가 더 깊어졌죠.
그럼 부상때문에 명상을 시작한 셈이군요.
몸과 마음 모두였죠. 허리가 아프면서 야구가 잘 안 됐어요. 그러면서 항상 전 저 자신을 비관적으로 보고 미워했어요. 나중에 아픈 부위를 위해 명상을 했는데 꽤 많은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아픈 부위를 위한 명상은 어떻게 하는 겁니까.
아픈 부위를 생각하면서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하는 건데요. 상처를 향해 처음엔 ‘미안해’하고 이야기하면서 명상을 한참 해요. 다음엔 상처 부위를 향해 ‘지금껏 버텨줘서 고마워’하고 명상합니다. 나중엔 ‘사랑해’하면서 명상을 하죠.
그렇게 하면 도움이 됩니까.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외적인 문제에 대해선 초연하게 돼요. 아마 부상 부위는 늘 외적인 문제에만 집중하던 절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을 거예요. ‘정작 내 편은 안 들어주고, 엄한 편만 들어줬다’고요. 명상은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치유의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박 기자님은 가장 두려운 게 뭐에요?
(잠시 생각하다가) 제가 뿌려놓은 거짓과 위선 그리고 타인의 평가가 아닐까 싶어요.
사람들의 평가, 글에 대한 평가가 되겠군요.
네.
전 야구를 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굉장히 컸어요. 텍사스에서 뛸 땐 죽음이란 걸 생각하기까지 했죠. (담담한 목소리로) 우린 모두 삶과 죽음 사이에 있어요. 사실 죽음은 지금 찾아오나, 먼 훗날에 찾아오나 언젠가 찾아오게 마련이에요.
그렇지요.
언제 죽으나 똑같다고 생각하면, 죽음이 늘 우리 곁에 있다고 인식하면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태연해져요. 그 깨달음이 정말 컸던 것 같아요.
저도 ‘명상으로 몸과 마음을 치유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명상을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꽤 어려운 수행 같은데요.
(고갤 흔들며) 그렇지 않아요. 지금 저와 대화를 나누면서 생각하시는 것도 명상이에요. 자신의 생각을 늘 들여다보는 게 명상이에요. 우린 늘 명상하고 있어요.
(중략)
한화에서 뛸 때 젊은 투수들에게 적지 않은 영감을 준 것으로 압니다.
한화 있을 때 젊은 투수들한테 물어본 적이 있어요. “넌 투수가 뭐라고 생각하니?”라고. 그러니까 “타자를 아웃 시키고, 팀을 승리로 이끄는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전 그랬어요. “그 말도 맞다. 하지만, 그보다 투수는 공 던지는 사람이다.”
그 말에 숨어 있는 의미는 뭔가요?
마운드에선 공 던지는 것만 생각하라는 뜻이었어요. 내 공에 집중할 때 타자도 아웃 시킬 수 있고, 팀도 승리로 이끌 수 있어요. 어느 나라나 불펜에선 기가 막히게 던지는데 실전 마운드만 올라가면 형편없이 무너지는 투수들이 있어요. 왜 그렇겠어요? 포수 미트와 내 공에만 집중해야 하는데 타자를 더 의식해서 그래요. 정말 내 공에만 집중하게 되면 포수 미트만 또렷하게 보이고, 타자는 뿌연 실루엣처럼 보이지 않게 돼요. ‘훈련을 실전처럼, 실전을 훈련처럼 하라’는 말의 의미는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할 때 흔들림이 없다는 뜻입니다. 저도 나중에야 그 뜻을 알게 됐어요.
찬호 씨처럼 뛰어난 투수이거나 베테랑들이나 그렇게 할 수 있지 대부분 투수에겐 꽤 어려운 미션이 아닐까 싶어요.
과연 그럴까요? 제 야구인생에서 큰 가르침을 준 사람이 바로 그랙 매덕스에요.
매덕스요?
네. 마운드 위에서의 매덕스 기억나시죠? 얼마나 터프하게 던져요. 한창 현역 때 하루는 경기 마치고서 심리학 박사님께 전화를 드렸어요. “7회까지 던지긴 던졌는데 너무 창피하게 던졌다”고. “그런데 비디오로 다시 보니까 죽이게 던졌더라”고. “그래도 지금 감정은 정말 창피하고, 골치가 아프다”고. 그러니까 그분이 “솔직해서 좋다”면서 “네 전화 오기 전에 매덕스랑 통화하고 있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매덕스가 뭐라고 했는 줄 아세요?
어려운 질문인데요.
“오늘 경기에서 완봉승을 따내긴 했는데 너무 두려워서 경기 내내 긴장된 상태에서 던졌다”고. 사이영상 투수라면 매경기 쉽게 쉽게 던질지 알았는데 그런 대투수도 마운드 위에선 긴장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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