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팅티 연습으로 얻은 마음의 평화 (숀 그린)

숀 그린 자서전 <Stillness at 95 mph>의 일부 내용입니다. 감독, 코치와의 갈등으로 인한 끓어오르는 분노를 떨쳐버리기 위해 시작한 배팅티 연습. 어린 시절부터 명상과 동양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숀그린은 배팅티 연습을 하며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를 주의깊게 관찰하면서 내면의 평화와 타석에서의 집중력을 동시에 가져가는 리츄얼ritual로 활용합니다.

숀 그린 책

1997 토론토

메이저리그에서 2년을 보내고 난 후 나는 벌써 슬로우스타터라는 꼬리표가 붙기 시작했다. 나의 방망이는 천천히 달아올라 여름이 되어서야 뜨거워지곤 했다. 97시즌은 좀 다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봄이 거의 끝나가는 5월에 나의 방망이는 캐나다의 날씨처럼 여전히 차가웠다. 하지만 나는 겁에 질리지는 않았다. 6월과 7월로 접어들면 분명히 달라질거라 믿고 있었다. 나만의 스윙을 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올해는 벤치에 머물러야 하는 새로운 난관에 부딪혀야 했다. 방망이가 뜨거워질 기회 자체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시토 개스톤 감독은 두번의 월드시리즈를 우승시킨 사람이었다. 그는 고참선수들을 중용했고 옛날 방식을 선호했기 때문에 그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시토 감독은 젋은 선수들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24살의 나는 주전선수로 뛰기 충분한 성적을 내고 있었다. (94년 트리플에이 타격상, 95년 아메리칸리그 TOP5 신인 선정, .280대의 통산 타율 등) 하지만 나에게는 좀처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토론토에서의 루키시즌에 나는 .288의 타율과 15홈런을 기록했다. 그것도 꼴찌팀에서. 하지만 나는 오른손 투수만을 상대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97년 5월 중순에 시토 감독은 나의 출장시간과 관련한 프론트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나는 덕아웃의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 종일 경기를 지켜보는 처지가 되었다.

몇주간 좌절의 시간을 보낸 후 나는 고드 애쉬 단장을 만나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경기를 뛸 수 있는 어디든 가고 싶다고 말했다. 1~2주 정도 지나자 나의 이름이 포함된 트레이드 루머가 매일같이 리그 내에서 돌기 시작했다. 결국 시토 감독도 이에 관해 말을 꺼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토론토 스카이돔에서 양키스와의 경기가 벌어지기 4시간 전쯤이었다. 나는 유니폼을 입고 시토 감독의 방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감독이 나를 불렀다.

“여기야. 그린! 들어와서 좀 앉지. 할 얘기가 있네.”

감독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 앉으며 나의 심장은 심하게 요동쳤다.

“이봐. 숀. 내가 자네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나? 내가 자네를 기용하지 않는 것 때문에?”

시토 감독은 이어서 말했다.

“자네는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어. 그런데..”

그는 잠시 하던 말을 멈추고 나를 기용하지 않는 이유를 찾는 듯 했다.

“자네는 수비를 좀 더 보강할 필요가 있어. 어떤 감독도 자네의 수비하는 모습을 보면 기회를 주기 어려울거야.”

나는 의자에서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지난 2년간 나는 우익수에서 플레이를 하며 늘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에러를 할 때마다 시토 감독의 표정에서 묻어 나오는 짜증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수비는 꾸준히 발전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에는 어떤 분명한 증거도 보여줄 수 없었지만 2년 이내에 나는 골든글러브 타이틀을 따낼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말이야. 숀. 공을 좀 당겨쳐서 더 많은 홈런을 만드는 법을 배워야 해. 자네는 도루를 할만큼 발이 빠른 편은 아니잖아?”

시토 감독은 덧붙였다.

“제게 그린 라이트(마음껏 도루를 하라는 사인)를 주신 적이 없는데 제가 도루를 할 수 있는지 어떻게 아세요?”

나는 딱 잘라서 물었다.

“그리고 저도 몸쪽 공을 잡아당겨 넘기는 법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왼손 타자로서 공을 당겨친다는 것은 공을 일찍 건드려 타구를 오른쪽으로 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으로서 홈런이 나올 확률을 높이는 것이다. 나는 그저 힘을 실어 공을 때릴 뿐이지 특별히 잡아당겨 치고자 하지는 않았다. 그건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시토 감독은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럼 자네는 자네의 길을 가게나. 숀. 미팅은 끝났네.”

몇 분 후에 나의 심장박동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시토 감독은 나를 놀라게 할만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나를 선수로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준 첫번째 시간이었다. 이제 내가 왜 벤치에 있는지는 분명했다. 나는 라커룸으로 돌아가서 방망이를 잡았다. 그리고는 가까운 곳에 사는 마이너리그 코치, 가쓰 이오르그를 찾았다. 배팅 게이지에서 볼을 던져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오케이, 그런데 먼저 윌리에게 부탁을 해보게나.”

윌리 업쇼는 팀의 배팅 코치였다. 그는 시토 감독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었던 것이다.

“이미 찾아봤어요. 그런데 안계시네요. 그러니까 배팅 케이지로 와줘요.”

나는 거짓말을 했다. 지난 몇 주간 나는 윌리 코치 몰래 배팅 게이지를 들어가 연습을 하곤 했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내가 더 나은 타자가 되는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95년 토론토에서 시즌을 시작할 때 나의 타격 코치는 래리 히슬이었다. 그는 어린 왕자 같은 분이었다. 자신의 선수시절을 다 기억하고 있었고, 배팅이 실제로 얼마나 어려운 지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나를 격려해 주었다.

“오. 숀. 내가 너같은 스윙을 가졌으면 나는 지금도 뛰고 있을꺼야. 그냥 그대로 쭉 계속하면 돼.”

그는 그해 말의 코칭 스태프 미팅에서도 나의 편을 들어주었다. “오른손 투수든 왼손 투수든 상관없이 숀에게 주전기회를 주면 어때요? 숀은 잘 해내고 있고 지금 우린 보스톤에 25게임이나 뒤져 있어요. 숀의 플레이를 한번 봅시다. 손해볼게 없잖아요?” 하지만 히슬 코치의 제안은 무시되었고 시즌이 끝난 후 타격 코치는 윌리 업쇼로 교체되었다.

윌리 코치가 96년에 왔을 때 그의 주요 임무는 존 올러루드와 나를 파워 히터로 탈바꿈시키는 것이었다. 윌리 코치의 시각으로 그것은 볼을 당겨치는 것을 의미했다. 윌리 코치와 시토 감독 모두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선수생활을 하며 당겨치는 타법을 선호했다. 패스트볼에 방망이가 늦는 것을 남자답지 못한 모습으로 간주하던 시절이었다. 윌리 코치의 지도하에 올러루드와 나는 공을 우익수쪽으로 보내기 위해 연습을 해야했다.

어느 오후에 시토 감독과 윌리 코치는 올러루드와 나에게 홈플레이트에 최대한 가까이 붙어 타격을 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면 모든 공이 몸쪽 공처럼 느껴져 당겨쳐야만 하기 때문이다. 시즌 전반기 우리 둘의 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올러루드는 93년에 월드시리즈 우승팀에서 타율왕 타이틀을 차지했던 선수다. 그 시즌 내내 4할 가까운 타율을 유지했었다. 지금 코칭 스태프는 올러루드로 하여금 열 개 정도의 홈런을 더 쳤으면 하는 바램에서 2~4푼 정도의 타율을 포기할 것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올러루드와 나는 타석에서 느끼는 좌절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윙을 바꾸라는 지시가 없어도 안타를 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97년 봄의 그날,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시토 감독과 윌리 코치의 지도없이 배팅 연습을 하기 위해 가쓰 이오르그 코치와 함께 배팅 게이지로 갔다. 게다가 나는 시토 감독과의 미팅에서 겪은 좌절감을 어떻게든 해소할 필요가 있었다. 억눌린 에너지를 땀으로 분출해야 했다.

가쓰 코치와 함께 클럽하우스의 복도를 지날 때 벽에 걸린 사진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블루제이스팀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진이었다. 그 사진 중에는 윌리 업쇼 코치가 블루제이스의 1루수로 뛰던 모습도 있었다. 바로 그 순간 클럽하우스로 통하는 문이 열리며 윌리 코치가 나타났다. 사진 속의 인물보다 10년 더 나이를 먹은, 여전히 멋진 몸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를 피할 방법은 없었다.

“안녕하세요. 코치님. 가쓰 코치와 함께 배팅 게이지로 가는 길입니다. 방망이 좀 돌리려구요.”

당황스럽고 짜증난 표정의 윌리 코치는 목소리를 내리 깔며 말했다.

“나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니오. 코치님께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가쓰 코치님과 오른손 투수를 상대하는 연습을 좀 하려구요.”

윌리 코치는 왼손잡이였고, 배팅볼을 던져주는 것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가끔은 왼손 투수를 상대로 한 연습도 해야지”

윌리 코치의 말에 나는 완전 열이 받았다. 지난 3년간 나는 플래툰시스템으로 오직 오른손투수만 상대했다. 나는 마이너리그에서 왼손투수를 상대로 좋은 성적을 냈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로 올라와서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딱잘라 말했다.

“저도 왼손투수를 상대로 잘 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안잖아요. 그래서 가쓰 코치와 연습을 하고 싶습니다.”

나와 윌리 코치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가쓰 코치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둘 사이의 긴장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한쪽에 서있었다. 그도 나만큼 불편해 하고 있었다.

“안돼! 나의 허락없이 배팅 게이지에 들어가서 연습할 수 없네.”

윌리 코치의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잠시 놀라 주저하다가 나는 “진심이세요?” 하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말이 사실임을 알려주었다. 나는 마치 내가 들고 있는 루이스빌 슬러거 방망이에 제대로 한방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배팅 게이지로 가는 대신 나는 스윙을 할 수 있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클럽하우스에서 덕아웃으로 가는 길에는 낡은 카페트가 깔려 있고, 그 길이 시작되는 곳에는 배팅티와 공가방, 그리고 네트가 있다. 그곳에서 선수들은 타석에 들어서기 전에 5~10번의 스윙을 하곤 한다. 특히 대타로 나서는 선수들은 그곳이 유용한데, 배팅 게이지까지는 다소 거리가 있어서 게임 중에 잠깐 연습하기에 좋기 때문이다. 지금 나에게는 배팅티와 조그만 네트가 허락을 받지 않고 스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나는 공가방을 들고 와서 방망이를 돌리기 시작했다. 나의 스윙은 완전 짐승같았고 기교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매우 쎄게 방망이를 휘둘렀는데, 그것은 내 안의 분노를 흘려보내기 위함이었고, 또 하나는 모든 사람들이 내가 얼마나 열받았는지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계속 스윙만 했다. 나의 많은 동료들과 코치들은 경기장에서의 정규 배팅연습을 위해 덕아웃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 중 몇명은 아마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도 나의 맹렬한 스윙을 본 사람이면 뭔가 나에게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내 머릿속은 스윙하는 내내 여러 생각들로 돌고 있었다.

‘윌리 코치는 나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나는 정말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될까? 시토 감독은 나를 끔직하게 생각할지도 몰라.’

이런 잡념들과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계속해서 방망이를 휘둘렀고 옷에서는 땀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글러브를 들고 4시30분에 시작하는 팀의 스트레칭 세션을 위해 자리를 옮겼다. 경기장에 다리를 꼬고 앉아 팀의 스트레칭 루틴을 따라하며 나는 미래에 대한 걱정에 사로잡혔다. 나의 모든 커리어가 위험해 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나는 비록 동료들과 무척 잘 지내고 있었지만 시토 감독과 몇몇 코치들은 내가 실수를 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어쩌다 선발라인업에 포함되기라도 하면 정말 최고의 경기를 해야만 했다.

게다가 문제는 윌리 코치와 그런 갈등이 있었기 때문에 시즌 내내 배팅 게이지에 들어가 연습을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경기에도 뛰지 못하고 배팅 게이지에서 연습도 못하면서 타격 실력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것이 내 앞에 주어진 과제였다. 나에게 주어진 것은 매일 시합전에 주어지는 짧은 팀 배팅연습과 클럽하우스로 가는 길에 놓여져 있는 조그만 배팅티가 전부였다. 그 배팅티가 효과를 가져와야만 했다.

그 후로 매일같이 나는 유니폼을 갈아입고 방망이를 들고 배팅티와 자그마한 네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오래지 않아 팀의 모든 사람들이 코칭 스태프와 나의 관계를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날 나의 머릿속을 휘감았던 분노와 두려움을 똑같이 품고 방망이를 휘둘렀다. 나는 어렸고 자존심도 쎈 편이었다. 살면서 처음 반항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에 대해 스스로를 멋있게 느끼고 있었다. 솔직히 지금 살펴보면 내가 한 배팅티 연습은 그저 화를 달래려고 한 것, 그리고 에고를 조금 과시하려고 한 것 뿐이었다. 하지만 4~5일째로 접어들자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그 과정을 즐기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15개 내외의 스윙을 하고 나면 나의 마음은 잠잠해지곤 했다. 그러면서 스윙도 물흐르듯 느껴졌다. 나는 배팅티 앞에서 보내는 20~30분의 시간을 제대로 즐기고 있었다. 심지어는 스트라이크 존에 따라 티의 위치를 옮겨가며 나만의 루틴을 개발했다.

나는 경기 상황을 상상했다. 지금은 덕아웃에서 지켜볼 수 밖에 없는 투수들을 직접 상대한다고 가정하곤 했다. 나는 공이 배트에 맞고 네트에 닿는 소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농구에서 깨끗한 슛이 들어가 골망에 공이 닿는 소리와 같았다. 나는 매번 공을 똑같은 방식으로 티에 올려놓는, 나만의 리츄얼ritual을 만들었다. 나의 호흡에는 리듬이 있었다. 티에 볼을 올려 놓으며 숨을 들이 마시고, 자세를 잡으며 숨을 참았다가, 스윙을 하며 숨을 내쉬었다.

일상의 훈련을 주도적으로 계획하는 태도

과연 나의 배팅티 연습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나의 티연습은 일종의 벌처럼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다른 무언가로 다가오고 있었다. 단순한 타격 연습 이상의 것이 느껴졌다. 하나의 명상이 되어 가고 있다고나 할까?

남부 캘리포니아의 터스틴 고등학교 졸업반 시절, 나는 로버트 퍼시그가 쓴 <선(禪)과 오토바이 관리>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책에서 보여주는 동양적 통찰에 나는 묘하게 끌렸다. 나는 외부세계 뿐만 아니라 나의 내면세계를 탐구하는데 마음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나는 비슷한 종류의 책들을 탐독했다. <평화로운 전사>, <활쏘기의 선>, <싯다르타> 이런 책들은 일상의 마음상태와는 다른 깨어있는 삶이 있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마이너리그에서의 3년, 그리고 메이저리그로 올라와서의 2년 동안 나는 동양철학 관점의 인간 내면에 대한 공부를 계속해왔다. 삶이라고 하는 ‘게임’에 명상적인 접근방법을 발전시키는 한편, 야구라는 게임에 보다 효율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코치들과 노력을 기울였다.

97년 그날, 시토 감독과 윌리 코치와의 운명적인 사건 이전에 나는 ‘기공수련’을 조금 해본 적이 있었다. 겨울 몇달동안 나는 뉴포트비치에 있는 조그만 모임에 참석해 호흡을 컨트롤하는 방법을 배웠다. 코로 숨이 들어오고, 입으로 내쉬는 연습을 통해 나는 몸을 타고 흐르는 기(氣)라고 하는 존재 내지는 생명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 작업을 통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세션이 끝나면 눈이 유리처럼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입안에서도 흥미로운 맛의 변화가 느껴졌다. 기공 초보자로서 나는 제대로 연습을 하고 있다고 인정해주는 것 같은 그런 생리적인 피드백이 고마웠다.

나는 스프링캠프, 그리고 정규 시즌에서도 연습을 계속하려고 했다. 하지만 플로리다 캠프에서 몇 주가 지나면서 연습을 그만두고 말았다. (7시부터 트레이닝을 시작해야 하는데 새벽에 기공수련을 위해 한시간 일찍 일어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는 일은 보통 고역이 아니다. 그리고 하루종일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훈련을 하고 나면 다음날 훈련을 위해 빨리 씻고 자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일정이 빡빡하게 돌아갈 때 도움이 되는 여러가지 것들을 빼먹고 지나가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이다.

스프링 캠프의 훈련에 몰입하면서 나는 명상이 나의 일상적인 루틴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다는 것을 잊어갔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97년이 되어서야, 나는 배팅티 앞에서 두 세계가 하나로 녹아드는 체험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방망이를 잡고 우연히 명상을 하게 된 것으로 생각했다. 지금 나는 우연이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든 것은 그렇게 되기로 예정된 것이다. 내가 배팅 게이지에서 쫓겨난 것도 완벽한 타이밍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의 스윙은 경기장 구석구석으로 타구를 보내는데 보다 적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오프시즌 동안 명상에 관한 책을 읽고, 많은 시간을 실제 명상을 하며 보내면서 마음의 소음 너머에 존재하는 침묵stillness에 대해 알게 되었다.

배팅티 앞에서 배트를 돌리며 나는 몇달 전 기공수련을 위한 모임에서 느꼈던 바로 그 침묵을 다시금 느끼기 시작했다. 당시의 명상은 앉거나 서있는 상태에서 하는 움직임이 없는 형태였다. 반면 지금 하고 있는 명상은 움직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수없이 많은 스윙을 해왔기 때문에 스윙에 대해 생각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곧 아무런 생각없이 스윙을 할때 더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발견했다.

어떤 기술을 처음 익히는 선수가 연습을 하며 명상을 하는 것은 어렵다. 일정 수준으로 기술이 숙련되어 마치 그 기술이 제2의 본성처럼 몸에 스며들어야 한다. 시토 감독과 윌리 코치가 잡아당기는 스윙으로 바꾸라고 지시를 했을 때 나는 여러가지 생각으로 복잡했다. 그 결과 나만의 자연스러운 스윙이 일어날 때 경험하는 침묵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티연습을 2주 정도 하자 내가 오랫동안 해온 스윙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배팅 게이지에서 벗어나니 오히려 내가 어린 시절부터 발전시켜온 스윙으로 돌아가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나에게 주어진 과제는 이제 어떤 식으로든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기회를 잡아 라인업에 포함되는 일 뿐이었다.

6월 16일에 팀은 나를 대신해서 뛰고 있던 올스타 출신의 루벤 시에라를 방출했다. 그날은 아버지의 생일이었는데 아마 촛불을 불며 기원한 소원이 하늘에 닿았던 것 같다. 나는 몇 주만에 선발라인업에 포함되었다.

주전으로 뛰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 좋은 소식이었지만 나쁜 소식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상대해야 할 투수가 그레그 매덕스였다는 것이다. 역사상 최고 투수 중 한명이라고 불리는 대투수를 마주해야 했다. 나는 배팅티 앞에서 보낸 수많은 외로운 시간들이 분명 길을 열어줄 것으로 믿었다.

2회에 나는 매덕스를 상대로 첫 타석에 들어섰다. 의외로 차분하고 담담했다. 나는 1-1 카운트에서 체인지업을 잡아당겨 오른쪽 담장을 넘어가는 홈런을 만들어냈다. 나는 그동안 체인지업같은 구속이 떨어지는 변화구를 치는데 늘 어려움을 겪어왔었다. 하지만 명예의 전당을 예약해둔 전설의 투수가 던진 공이 손을 떠날 때부터 공의 궤적이 무척 선명하게 다가왔다.

나는 5회에도 안타를 쳤다. 그리고 8회에는 또 하나의 홈런을 기록했다. 그 후로 나는 확고한 선발이 되었고 한 달 동안 타율을 6푼 가까이 끌어올렸다.

나는 배팅티라는 최고의 친구를 얻었다. 선발 라인업에 다시 이름을 올리고 처음 한달간 배팅티 루틴은 내 훈련의 기본이 되었다. 티 위에 야구공을 실밥이 수직이 되도록 올려놓는다. 심호흡을 하고 나만의 최고의 스윙을 한다. 다시 호흡을 하고 이 과정을 반복한다. 그리고는 다른 코스의 공을 연습하기 위해 티의 위치를 바꾼다. 이것은 어릴 때 마당에 아버지가 만들어 준 배팅 게이지에서 하던 연습과 비슷했다. 차이가 있다면 지금은 타격 메카닉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오직 나의 호흡과 공에만 집중한다.

스윙이 계속 좋아지고, 타석에서 다시 평온을 찾은 덕에 나는 배팅티 연습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나는 영적인 탐구를 갈망하고 있었지만 야구 시즌에는 배트를 휘두르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것은 생계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 두 세계는 완전히 합쳐지지 못했다. 배팅티 연습의 명상적인 효과와 기타 부수적인 영향에는 타격이 보다 잘된다는 것 이상의 미묘한 무언가가 있었다. 내 안에는 어떤 것에도 영향받지 않는 침묵이 천천히 자라났다. 그것은 마치 과일나무의 뿌리가 땅 밑에서 서서히 퍼져나가는 것과 같았다.

97년 여름을 지나며 나는 배팅티 연습을 계속 했고, 이런 맥락은 점점 더 분명해졌다. 이제 나에게 배팅티연습은 타자로서의 성공 못지 않게 중요하게 다가왔다. 나는 매일 20분씩 하는 배팅티 연습을 갈망하게 되었다. 그것은 공을 더 잘 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배팅티 연습은 이제 나를 평화와 침묵으로 이끌어주는 수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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