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해고되었습니다
뉴스레터 15호 ‘코치라운드 생각’은 부모님들이 뜻을 모아 문제 감독을 해고시킨 기억을 적어보았습니다.
아이가 리틀야구를 하던 시절에 운동선수 부모로서 뿐만 아니라 저의 삶 자체에도 큰 영항을 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부모들이 뜻을 모아 감독을 해고한 일이었는데요. 얼마 전 어느 분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당시 감독은 말과 행동이 매우 거친 사람이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폭력적인 지도자였죠. 취미반 리틀야구였음에도 불구하고 시도 때도 없이 내뱉는 고성과 욕설에 많은 아이들이 상처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총무 어머니를 저녁에 불러 사적으로 만나려고 하는 부적절한 행동을 반복했습니다. 이런 행태에 분노한 부모님들은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논의하기 시작했고, 아무리 취미로 하는 야구라고는 해도 이런 지도자에게 아이의 시간을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뜻을 모았습니다.
부모님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였고, 감독에게 해고를 통보했습니다. 당시 학부모 회장님께서 단호한 목소리로 말씀하신 한 문장이 생생합니다.
“000감독. 당신은 해고되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감독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여러 협박에 가까운 말들을 부모님들께 퍼부으며 저항했지만 부모님들의 뜻이 단호했기에 별다른 수가 없었습니다. 이후 벌어진 여러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감독은 팀을 떠나게 되었고, 부모님들은 아이들을 믿고 맡길 새로운 지도자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며 저는 묘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솔직히 저는 감독 해고통보 자리에 나와달라는 학부모 회장님의 요청에 머뭇거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저는 주말에 시간을 쏟는 일이 있어서 자주 야구팀에 들락거리던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감독이 정말 문제라는 생각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언가 행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까지는 미치지 못한 상태였죠. 어찌보면 아이를 맡겨놓고 자기 할 일 다했다고 여기는 무책임한 부모의 전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주저하는 마음으로 참여한 자리에서 목격한 장면은 찬물을 서너 바가지 끼얹은 것처럼 제 마음을 크게 각성시켰습니다.
그 무렵 저는 심리와 멘탈 쪽 공부를 한답시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온 정신이 ‘나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상태였는데요. 오로지 나에게만 관심을 쏟느라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피지 못한 스스로가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당신은 해고되었습니다’라는 말이 저를 꾸짖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학부모 카페를 시작한 것도 어쩌면 이 일을 겪으며 얻은 깨달음이 크게 영향을 미쳤을 지도 모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가 운동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내 아이, 남의 아이 가리지 않고 돌봐주신 많은 부모님들을 만난 것은 정말 커다란 축복이었습니다. 특히 야구장을 마련하기 위해 리틀야구 부모님들이 기울인 노력은 가슴뭉클한 기억입니다. 늘 분당천 한켠의 공원에서 돌을 골라가며 운동을 하고, 가끔은 그곳마저 쓸 수가 없어서 탄천의 다리 밑에서 연습을 하곤 했던 처지가 안쓰러워서 부모님들은 분당에도 리틀야구장을 만들어 보자는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분당의 금싸라기 같은 땅에 아이들 야구장을 마련하는 것은 단지 의욕만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부모님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시청과 구청, 시의원들을 찾아 다니며 아이들에게 야구장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드렸습니다. 금방이라도 될 것 같은 희망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다같이 흥분했다가, 어려울 것 같다는 말에 낙담하는 시간이 오래 이어졌습니다. 3년 여에 걸친 부모님들의 정성이 닿아 성인야구장이 만들어지는 곳 바로 옆에 유소년 야구장도 한면을 추가하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아이들을 위한 야구장이 하나 만들어졌지만 안타깝게도 그 야구장을 만들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부모님의 자녀들은 리틀야구팀을 졸업하며 그곳에서 단 하루도 야구를 하지는 못했습니다. 지금도 차를 타며 그곳을 지날 때면 당시에 부모님들이 기울였던 정성을 떠올립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많은 것들이 그렇게 누군지도 모르는 분들의 결심과 수고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