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으로 져도 안타 하나에 환호하다 (박찬영, 미국의 유소년 야구 이야기 1편)

제가 있는 도시의 초등학교에는 야구팀이 없습니다. 야구는 학교와는 상관없는 방과 후 활동이고 개인적인 영역입니다. 수영이나 농구, 풋볼, 축구 모두 마찬가지이고 스케쥴은 학교 일정에 최대한 방해가 되지 않게 짜여집니다. 운동을 한다는 것은 학업과 별개인 하나의 과외활동입니다.

제가 있는 도시의 리그는 제 아이가 들어갈 때만 해도 조직이 되어 있지 않았고 그냥 연령대별 팀이 한 두개 있는 정도였습니다. 아들의 팀에는 헤드코치만 있었고 가끔 따라온 아버님들이 아이들 연습할 때 자발적으로 도와주셨습니다.

모두가 타선에 들어가고 수비도 돌아가면서 보다

그 당시 7~8살 루키팀의 등록비는 평균 100달러 정도 되었고 등번호가 새겨진 유니폼 상의와 바지, 모자와 벨트를 받았습니다. 루키팀은 두 개가 있었고 팀마다 알루미늄으로 된 팀배트와 헬멧, 글러브가 대여섯개 있어서 장비가 없는 아이가 쓰게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7살 가을부터 야구에 조금더 빠지기 시작한 9살 봄까지 장비를 사지 않고 그 장비들을 썼습니다. 연습은 일주일에 1~2번 한 시간씩 했고 경기는 시즌당 약 10경기를 했습니다.

경기에는 16명이 모두 타선에 들어갔습니다. 수비도 돌아가면서 봤습니다. 저를 포함해 부모들 대부분이 야구에 문외한이었고, 헤드코치도 말없이 지켜보는 스타일이었습니다. 대패하는 경기라도 가끔 안타 하나 치거나 공을 제대로 던지고 받는 플레이 자체를 기뻐했습니다. 20대 0으로 진 경기에서 안타 하나로 경기에 이긴 것 같이 기뻐했던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류현진 선수가 미국의 유소년 야구를 보고 바뀐 생각

잠깐 부모들 분위기를 말하자면 뭔가 같이 하려는 움직임은 없고 지극히 개인적입니다. 저같은 외국인 뿐만 아니라 미국인들끼리도 눈이 마주치면 인사는 합니다만 대화를 길게 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습니다. 예외도 있지만 자연스럽게 말트는데 보통 시간이 좀 걸립니다.

야구장에는 야구하는 아이들 뿐만 아니라 오빠나 형을 따라간 동생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야구장이 있는 곳은 많은 경우 놀이터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처음 방문하는 야구장에 가면 놀이터가 어딘지부터 찾습니다. 많은 경우 아이가 둘 이상이기 때문에 부모들에게 최악의 야구장을 꼽으라고 하면 놀이터 없는 야구장을 꼽습니다.

세 시즌, 일년 반 동안을 아이는 야구를 하면서 좋아하는 간식도 먹고, 주변 도시 야구장 구경다니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언젠가 그만 두겠지 생각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하게 아이가 야구를 좋아해서 계속 하다 보니 지금은 야구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지역리그의 도움과 혜택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점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디렉터와 코디네이터는 모두 봉사직

지역리그 디렉터나 코디네이터들도 코치들과 같이 전원 봉사직책입니다. 아이의 세 번째 시즌에 새로운 리그 디렉터가 왔습니다. 과거 야구경험이 있는, 박사과정을 밟는 30대 중반의 나이가 좀 있는 사람이었는데 리그의 많은 것을 바꾸었습니다. 먼저 리그 오프닝 이벤트 광고를 지역에 대대적으로 하고 시의 지원을 받아서 바운스하우스를 많이 가져다 놓고 지역주민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놀수 있게 했습니다. 선수등록을 한 아이들은 무료이고 등록을 안한 아이들도 2달러 정도 되는 간소한 금액을 받았는데 주말에 정말 많은 가족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야구장으로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야구팀에 등록하면 쿠폰북을 줘서 지역의 식료품점이나 음식점에서 할인을 받을 수 있게 했습니다. 리그의 인지도가 꽤 올라갔고 아이 또래팀은 네 팀으로 늘어서 지역리그 팀간의 교류전도 훨씬 잦아졌습니다. 그래서 경기가 시즌에 13게임 정도로 늘었습니다. 중간에 토너먼트에 참가도 해서 토너먼트 게임을 모두 진다고 해도 17게임 정도를 플레이했습니다. 새로온 디렉터는 연습시간을 보장하고 야간에도 연습을 할 수 있도록 해줬습니다. 스케쥴이 없어도 팀의 코치가 전화하면 밤에도 바로 조명을 켜줬습니다.

인원이 늘어나고 스폰서들이 모이면서 망가져가던 배팅 케이지와 경기장 펜스도 순차적으로 수리가 되었습니다. 몇몇 구장에는 케이지를 새로 지었습니다. 경기장마다 스코어와 이닝, 볼카운트와 아웃카운트를 보여주는 스코어보드도 설치했습니다. 유니폼도 질이 스포츠웨어 수준으로 좋아져서 스폰서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 상의를 입고 다니는 아이들이 생각보다 자주 눈에 띄었습니다.

네 번째 시즌에는 팀이 여덟 팀이나 되었습니다. 그 중 한 팀은 야구를 하기로 한 풋볼 트래블팀이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신선한 자극이 되었습니다. 발군의 운동신경으로 수비와 주루를 하고 초기 약점이었던 타격이 좋아지니 금방 리그를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실력과 별개로 부모들과 아이들, 코치들 모두 매너가 나쁘고 폐쇄적이었던 그 팀은 인기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 팀에는 지지 않겠다는 자극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들도 다음 시즌에 들어가는 9-10살 팀에서 투수가 되어서 그 팀 아이들을 혼자서 마운드에서 눌러버리겠다는 목표를 새우더군요.

더블 엘리미네이션이라 부르는 패자 부활 토너먼트

리그가 성장하면서 눈에 띄게 잘하는 아이들이 생겨났습니다. 디렉터가 시즌 후에 조직한 올스타 팀은 그런 아이들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Babe Ruth baseball 에서 조직하는 야구토너먼트에는 플로리다를 17개 지역으로 나눠 지역 대표팀을 뽑고 각 지역 대표들이 주예선과 미국권역별 토너먼트를 거쳐 전미 챔피언쉽에 도전할 수 있었습니다.

각각 팀마다 코치의 추천을 받은 5명을 올스타 트라이아웃을 거쳐 팀에 들어가기로 정해졌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코치에게 들으니 돌풍을 일으킨 팀이 자신들의 특별한 플레이어들이 다른 팀의 플레이어들과 섞이는 것은 전력이 약화되기만 하기 때문에 자팀에서 올스타팀 차출을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대신 자기 팀이 통째로 나가는 것을 요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모두 나가지 않겠다고 했다는군요. 냉정하게 보면 맞는 말이어서 요구는 받아들여 졌습니다. 대신 그 팀을 제외한 다른 팀에서 올스타팀으로 뽑힌 아이들 중에 그 팀의 코치들이 두 명을 뽑아 팀을 보강해서 B팀이 되었고 나머지는 전원 A팀으로 배치되었습니다.

지역리그와 시에서는 가능성이 있는 B팀에게 모든 지원을 몰아주었습니다. 그래서 B팀의 부모들은 참가비나 유니폼비도 면제되었습니다. 아이들이 뒤에 남았다는 것에 더불어 모든 비용을 내야 하는 부모들에게 그런 경험은 유쾌하진 않았습니다만 현실을 직시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주지역 예선은 풀게임 2게임을 바탕으로 시드가 짜여지고 토너먼트게임이 진행이 되는데 더블엘리미네이션이라고 불리는 한 번 지면 패자 브라켓으로 가고 두 번 지면 토너먼트에서 탈락하는 방식으로 진행이 됩니다. 미국의 많은 공식 토너먼트들이 이런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시드게임에서 2패, 토너먼트 게임 2패를 하고 A팀의 여름은 끝났습니다. 아들에게는 올스타 팀을 하면서 카운티 밖의 수준 높은 팀들을 접하게 되었고 잘하는 아이들을 보고 스스로의 위치를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시드게임에서 전패를 해 가장 잘하는 팀과 붙게 된 토너먼트 첫 게임에서 상대팀 아이들의 멋진 플레이를 보고 감탄했습니다. 강팀의 아이들이 쓰는 처음 보는 280달러 짜리 오렌지색 배트가 차원이 다른 반발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그 때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토너먼트에 임하면서 다른 팀들이 토너먼트를 즐기기 위해 한 준비에 참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아이들 간식을 한쪽에 쌓아놓고 원하는 대로 먹게 하고 발전기로 덕아웃과 부모들 천막에 선풍기를 돌렸습니다. 아이스박스에는 차가운 음료가 있었고 코치와 아이들은 언제나 마실 수 있었습니다. 토너먼트 기간에 경기 중간의 시간을 이용해서 야구장에 있는 그릴로 바베큐 파티를 했습니다. 아이들을 풀파티를 시켜주는 것도 흔하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만 그 당시로서는 참 생소한 광경이었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글 : 박찬영 (아이를 통해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는 것을 배워가고 있는 한 아빠입니다. 미국에서 Senior Data Scientist로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야구 6호에 소개된 글입니다. 우리야구 구입은 우리야구 스토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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