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의 인생을 운명에 맡기는 자세

지지교육연구소 박준규 소장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처럼 자식의 인생을 운명에 맡기겠다는 자세를 간직하려 하지만 자꾸 간섭하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건 어쩔 수 없네요.^^ 가끔 자식을 위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주변을 살피지 못하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어느 순간에는 저도 그랬을테구요. 운동부 학부모님들을 생각하면 저는 ‘죄수의 딜레마’가 떠오릅니다. 서로 협력을 하면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상황을 만들 수 있음에도 개인적인 욕심으로 서로에게 손해가 되는 선택을 하는 경우를 일컫는데요. 이러한 ‘죄수의 딜레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구체적인 방편을 소장님께서 말씀해주시네요. 자식의 성공이 아닌, 자식이 살아갈 세상의 제도와 시스템에 관심을 가지기. 성공하든 실패하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며 살 수 있도록.
어제 오전에 강의를 해달라며 내가 있는 공간으로 찾아온 분들이 있다. 더구나 강의료도 지불하겠다고 하니 이게 웬 떡이냐~하며 나름 열강을 했다.
내가 하는 일이 아이들 만나는 것이라 역시 학부모(엄마) 교육…..
잔혹동시로 불리는 이순영 어린이의 <학원가기 싫은 날>을 실마리로 아이들이 왜 엄마를 증오하는 시대에 살게 됐는지, 메리토크라시 사회의 한계와 자기교육만이 가능하다는 명제의 의미 등을 떠들었는데, 역시나 올 것이 오고야 만다.
“강의는 잘 들었는데 머리가 복잡해졌어요. 결국 엄마인 제가 어떻게 해야하는 건가요?”
일단 한숨 쉬고 대답했다.

————

“종교생활을 하면서 구복(求福)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마찬가지로 내 자식이 일류대학 나와서 험한 일 안 하고 돈 잘 벌고 남의 신망과 부러움도 사는 인생을 살기를 바라는 것이 자연스런 욕망입니다. 그러나 내 아이가 부모의 바람대로 되느냐 안 되느냐는 것은 운명의 영역입니다. 바람대로 될 수도, 바람과 어긋나게 될 수도 있어요. 잘 되거나 아니면 못 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언뜻 보아 농담 같지만 오직 이것만이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듭니다. 다만 원하는대로 되지 않아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며 살도록 제도가 뒷받침 돼야겠죠. 모두가 원하는대로 되기를 바란다면 그 사회는 빠르게 멸망할 겁니다. 실패한 자가 위대한 까닭이 여기 있어요. 반드시 실패한 자가 성공한 자와 함께 있어야 상생이 가능한 겁니다. 따라서 부모는 자식의 인생을 운명에 맡기겠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부모는 이런 메시지를 아이에게 주는 것이 할 일의 전부입니다. ‘네가 하는 얘기를 엄마(아빠)는 언제나 귀기울여 듣겠다’ ‘엄마(아빠)는 죽을 때까지 네 얘기를 잘 들어서 네가 외로울 일이 없을 것이다’ 이런 뜻만 전달하면 돼요. 오직 그 뿐입니다.”
———–

지금 한국의 어린이청소년들은 외롭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목소리를 아무도 귀기울여 듣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에 그것(es)는 없고 나-너의(Ich und Du/ I and You) 짝으로만 존재한다는 마틴 부버의 혜안은 언제나 유효하다. 나 따로 너 따로 존재한다고 믿는 세상에서 우리 아이들이 망가졌다. 나를 가능하게 하는 너가 되는 최초의 존재가 엄마(아빠)다. 엄마 아빠가 아닌 할머니 고모 이모 모두 ‘너’가 될 수 있다. 
그러니까 가까이 생활하는 엄마라서 내 아이의 ‘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너’가 될 수 있기에 엄마일 수 있다는 사고전환이 필요하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