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체육의 주인이 바뀌고 있다

학원축구에서 일어난 작은 변화의 움직임이 야구로도 전파되기를 희망합니다. 아들이 고등학생이고 엘리트 야구를 시작한지 6년이 지나가는데 저는 아직도 적응이 안되네요. 학교에 갈 때마다 만감이 교차합니다. (출처 : 경남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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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대 때 시작된 우리나라의 체육은 여전히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일제가 황국신민체조를 통해 일본 정신을 조선인의 몸에 새기고 싶어했던 것처럼 과거 권위적인 정권들도 국민체조 등을 통해 지배질서를 국민에게 내면화시키고 싶어 했다. 현대 정부와 미디어도 국민 전체가 즐기는 체육보다는 국가대표 선수가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 올리는 것을 훨씬 중요하게 여긴다. 학교 체육도 대다수 학생들은 배제한 채 학교 간판을 달고 대회에 나서는 엘리트 선수만을 육성했고, 그 선수들조차 경기의 주인공으로 대우하기보다는 학교 평판을 위해 동원하기에 바빴다. 권력이나 조직이 이처럼 엘리트 체육을 선호하는 이유는 승부를 통해 ‘스토리’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선수의 성공은 이내 조직의 성공, 체제의 성공으로 치환되면서 자기네 우수성을 홍보하는 자료로 둔갑한다. 우리나라 정부도 개발도상국일 때부터 태릉선수촌을 그렇게 활용했다.
 

그러나 체육이 마냥 체제나 조직의 선전 도구로 활용되는 것은 아니다. 체육은 종종 체제나 조직의 벽을 허물고 참여자나 구성원들이 주체적으로 자기 스토리를 창조하는 장을 제공하기도 한다. 19세기 말 영국에서 억압받던 공장 노동자들이 축구를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주체적인 기층 문화를 만들어낸 것이나, 무함마드 알리가 권투를 통해 반전과 흑인민권 운동에 불을 지폈던 사례들이 대표적이다.

청소년 축구의 무게중심이 학교팀이나 프로축구 산하팀에서 일반 클럽팀으로 넘어간 것이 물론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다. 축구에서 일어난 변화를 체육계 전반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도 아직은 무리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변화가 의미하는 바는 결코 작지 않다. 어쩌면 청소년이, 시민이 주인공이 되는 체육이 이제 막 한국 땅에서 시작하는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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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체육의 주인이 바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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