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팬과 ‘트럭 시위’ (이딴게 내 응원팀이라니 5편)
“저런 거는 왜 하는데? 자기들 돈으로 저렇게 하는 기가?”
며칠 전 가족과 함께 텔레비전 뉴스 프로그램을 시청하다 어머니께 이런 질문을 들었다. 응원팀의 성적 부진을 규탄하는 롯데 자이언츠 팬들의 트럭 시위 소식이 보도되고 있던 참이었다. 나는 간단히 정황을 설명했다. 최근 몇 년간 롯데의 성적이 좋지 않고, 심지어 며칠 전에는 무려 23:0이라는 스코어를 기록하며 프로야구 40년 역사상 최다 점수차로 패배한 터라 팬들이 폭발했다고. 트럭은 팬들이 돈을 모아서 부른 거라고도 설명해 드렸다.
부산 토박이시지만, 야구 팬은 아니신 어머니께서는 내 설명이 충분하지 않으신 듯했다. “롯데는 늘 못하는 거 아이가?” 어머니의 반문에 나는 조용히 덧붙였다. “올해가 이대호 은퇴하는 해라서 롯데가 잘 해야 돼요.” 어머니께서는 완벽히는 아니지만, 대강은 납득하신 것 같았다. 그리고 또 물으셨다. “아이고, 그럼 니도 저런 거 하나?” 나는 차마 소리 내어 대답할 수 없었다. 작년 겨울, 내 응원팀인 키움 히어로즈 팬들이 열었던 트럭 시위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지난해를 돌이켜보면 트럭 시위에 나선 프로야구 팬들이 유독 많았다. 트럭 시위 자체가 역병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풍조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시위 형태인 것을 감안하면, 팬들의 분노는 드러난 것보다 더 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팬들이 직접 모여서 집회를 열지 않았을까? 분노의 크기로만 따지면 이른바 ‘버스 방화’ 사건에 뒤지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지난해 두산 베어스와 KT 위즈의 한국시리즈 2차전이 열린 고척 스카이돔에 ‘전광판 트럭’이 나타난 게 시작이었다. 프로야구 첫 ‘리그 중단’ 사태가 정지택 KBO 총재 주도 하에 두산 베어스, NC 다이노스 등 특정 구단의 편의를 봐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의혹이 제기된 상황이었다. 여기에 두산 구단과 정지택 총재의 유착 설까지 불거지면서 야구 팬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트럭에 실린 전광판에는 ‘9개 구단은 들러리가 아니다’ 문구가 선명했다.
스토브리그에도 트럭 시위 행렬은 이어졌다. 수년 간 부진이 이어지는 가운데 구단 측이 외부 FA 영입을 하지 않기로 하자 한화 이글스 팬들은 참지 못하고 시위에 나섰다. ‘김승연 구단주님! 우리는 더 이상 보살이 아닙니다.’ 라는 문구는 많은 팬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다음 주자는 두산 베어스였다. 최근 몇 년간 FA를 맞이한 주력 선수들을 줄줄이 타팀에 내줬다는 것이 불만 사항이었다. 두산 팬들은 트럭 시위를 통해 구단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와 팬들과의 소통을 주문했다.
내 응원팀, 키움 히어로즈 팬덤에서도 분노의 불길은 거세게 불탔다. 영원한 ‘히어로즈의 심장’ ‘영웅의 4번타자’일 줄 알았던 박병호가 KT 위즈와 FA 계약을 맺고 팀을 떠난 것이다. 히어로즈 구단 측이 각종 물의를 일으킨 선수들을 영입하는 동안, 박병호와의 계약에는 소홀했다는 것이 알려지자, 팬들은 폭발했다. 재정난을 이유로 현금 트레이드로 선수들을 팔아 넘기는 걸 한두 번 봐온 것도 아니었건만, 구단부터가 팀의 역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팬들을 절망케 했다. ‘언제까지 영웅의 은퇴식을 원정석에서 지켜봐야 하는가’ 문구를 띄운 트럭이 구단의 메인 스폰서인 키움증권 본사와 홈구장 고척 스카이돔을 돌았다.
팬들의 분노는 시즌 중에도 이어졌다. 롯데 팬들의 시위에 앞서, 삼성 라이온즈 팬들도 트럭 시위를 벌였다. 지난해 2위로 선전했지만, 올 시즌 구단 역사상 최다 연패인 13연패에 빠지면서 부진했던 것이 문제였다. 또한 팬들이 홈구장인 대구 삼성라이온즈 파크에서 스케치북에 선수나 구단을 규탄하는 문구를 작성하는 ‘스케치북 시위’를 기획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구단 측은 구장 입장 대기줄의 모든 스케치북을 일일이 열어보는 등 평소보다 과도하게 검문하는 일이 발생한 것. 이러한 과잉 대응은 팬들의 분노만 자극하는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허삼영 감독은 ‘자진 사퇴’ 형식으로 사령탑 자리에서 물러났다.
스포츠 팬덤은 거칠다. 오죽하면 ‘훌리건’이라는 말이 다 있을까. KBO리그 팬들도 예외는 아니다. 리그 창설 후 40여년 간 버스 방화 사건, 구장 난입 사건 등 각종 굵직한 소요 사태를 일으키며 심심찮게 9시 뉴스에, 신문 사회면에 이름이 오르내리곤 했다. 이렇게 보면, ‘트럭 시위’ 정도는 양반인 것도 같다. 40년이 지나면서, 팬들이 분노를 발산하는 방식 또한 훨씬 세련되게 다듬어졌다고나 할까.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더라도 제 돈, 제 시간 들여서 열정을 쏟아붓기를 마다하지 않는 팬의 본질은 변치 않았다. 팬들의 애정은 맹목적인 구석이 있다. 여기서 일종의 비대칭과 불균형이 발생한다. 팬들의 충성심은 구단과 선수의 ‘비즈니스’를 넘어선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쌍욕을 하면서도, 끝끝내 감정 소모를 멈추지 못하고 18시 30분만 되면 프로야구 중계를 틀게 되는 것이다.
‘악플’보다 무서운 것은 ‘무플’이라는 말이 있다. ‘무관심’이야말로 프로야구가 싸워야 할 진짜 적일 것이다. 여름이 깊어 갈수록 승차는 벌어지고, 순위표는 굳어져 간다. 무관심이라는 손쉬운 길 대신 가뜩이나 날도 더운데 굳이 제 돈 써가며 공 하나하나에 분노하는 팬들의 미련함이 리그를 움직인다는 걸, 리그 사무국과 각 구단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작가 소개 : 구슬
KBO리그와 히어로즈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언제 망하는지 두고보자며 이를 갈게 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