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볼, 봄을 부르는 소리 (이딴게 내 응원팀이라니 11편)

플레이볼! 전세계인의 축제, 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만 그럼에도 야구 국제 대회로서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이 드디어 시작됐다. 2017년 이후 코로나19로 인해 일정이 미뤄지면서 6년 만에 열리는 다섯 번째 대회로, 20개국이 참가하여 보름 동안 맞붙어 세계 정상을 가린다. 20개국 참가는 역대 최다 기록이다. 새삼 대회 규모가 참 단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로컬(local)한 스포츠 아닌가. 마치 봉준호 감독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을 일컬어 로컬(local)하다고 표현했듯 말이다.

이러한 위기감은 제 5회 WBC에 임하는 각국의 관계자 및 야구인들이야말로 가장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듯하다. 한국, 대만, 일본 동아시아 3국은 언제나 그랬듯 꾸릴 수 있는 최대한의 전력으로 팀을 짜서 출전한다. 특히 정상을 다투는 전력인 한국과 일본이 그렇다. 우리 대표팀에서는 가장 주목받는 예비 메이저리거 중 한 명인 이정후가 아버지 이종범에 이어 태극 마크를 달면서 부자 출전 기록을 세운다. 일본 대표팀에서는 메이저리그에서도 투타겸업에 성공하며 야구사를 다시 쓰고 있는 오타니 쇼헤이의 활약이 관심사다. 대회 전체를 통틀어 가장 큰 볼거리로 꼽히는 한일전에는 무려 일본 총리가 직접 시구에 나선다. 그야말로 WBC 흥행에 ‘진심’인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대회 2연패에 도전하는 미국이다. 미국은 자국 리그 챔피언 결정전에 무려 ‘세계(world)’ 라는 표현을 갖다붙일 정도로 콧대가 드높지만, 자국 리그가 가장 중요하다는 이유로 국제 대회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한 모습을 보여 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초대 WBC 대회 이후로 다시 한 번 ‘드림팀’을 꾸렸다. 투수 쪽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평가지만, 그럼에도 마이크 트라웃 등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현역 스타 플레이어들이 즐비하다. 주축 선수진에 메이저리거들이 다수 포진한 도미니카 공화국 역시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힌다. 컨디션 관리를 이유로 국제대회 참가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 왔던 메이저리거들이 이번 대회에 대거 참가하면서 야심만만하게 대회 흥행, 나아가 야구라는 종목의 부흥을 노리는 모양새다.

‘야구의 세계화’를 위해 주요 국가들이 힘을 모으는 데는 자국 리그의 침체라는 현실이 씁쓸하게 자리하고 있다. 팬덤의 고령화 및 신규 팬 유입 부족 현상이 더이상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부상한 것이다. KBO리그 관중수는 2017년 이후 줄곧 하락세에 있다. 긴 경기 시간과 복잡한 규칙으로 인해 원체 진입장벽이 컸던 프로야구에 팬데믹은 치명타였다. 야구의 가장 큰 매력인 ‘직관 경험’을 불가능하게 만듦과 동시에 콘텐츠 소비 패턴을 바꿔 버린 것이다.

연재를 시작한 이래 줄곧 ‘야구 냉담자’를 자처해오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되고 보니 일개 팬인 나조차도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가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을 외치게 만들었던 월드컵의 축구부터 “농구 좋아하세요?”를 다시 묻게 만든 슬램덩크의 농구까지. 최근에 이렇게 스포츠 관련 콘텐츠가 연달아 뜨겁게 유행한 적이 있었나 싶은 가운데서도 유독 야구만큼은 그 흐름을 타지 못했다. 내가 기대하는 ‘별들의 잔치’가 ‘그들만의 잔치’로 전락할까봐 겁이 났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WBC에서 우리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선전이 중요하다, 는 논지로 글을 매듭짓고 싶지는 않다. 준우승에 빛나는 2009년 대회 때처럼 높은 순위를 기록한다면 당연히 기쁘겠지만, 순위를 떠나서 이번 대회를 치르는 총체적인 과정 자체가 한국프로야구를 평가하는 일종의 시험으로 기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흥행 성적이 저조하면 저조한 대로 대책을 세워야 하고, 좋으면 좋은 대로 원인을 분석해야 한다. 일종의 모의 시험으로 비유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관점에서, 박찬호의 인터뷰는 곱씹어볼 만하다. 실력으로만 보면 명실상부하게 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임이 틀림없는 안우진의 대표팀 미발탁에 대해, 그는 “이런 큰 선수가 그런 사례를 남긴 것 때문에, 오히려 처벌이 가혹하면 가혹할수록 어린이들에게 좋은 교육이 될 것” 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해설에 임하는 각오를 묻는 질문에는 “부족함이 있다면 그 부족함도 냉정하게 지적하면서 시청자들과 젊은 아마추어, 어린 선수들이 좀 더 느낄 수 있게 초점을 잡아보고 싶다”고 답했다. 스포츠맨십과 ‘과정’의 중요함을 강조한 대목이었다. 한 차례의 국제대회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넓은 시야가 돋보였다.

이번 WBC가 성공한다고 해서 갑자기 야구가 축구만큼 세계적인 스포츠로 부상하지는 않을 것이고, KBO 리그에 갑자기 천만 관중 시대가 열리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WBC가 실패한다고 해서 야구라는 종목이 갑자기 소멸하는 것도 분명히 아니다. WBC가 끝나도 리그는, 야구는, 삶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장기적인 흐름 속에 있고 그 흐름을 바꾸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을 뿐이다. 플레이볼! 이번 대회를 통해 봄이란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불러내야 하는 것임을 익힐 수 있길 바란다. 그것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희망의 가장 현실적인 형태일 것이다.

작가 소개 : 구슬
KBO리그와 히어로즈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언제 망하는지 두고보자며 이를 갈게 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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