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WBC 단상
WBC 단상
1. 실력 부족 맞다. 그런데 그 실력은 던지고 때리는 실력이 아닌 것 같다.
이번 대표팀을 옆에서 보면서 느낀 점은, 매우 경직돼 있다는 것이었다. 선수들의 표정과 말, 몸짓에 여유가 없었다. 홈에서 약체를 상대로 이기면 본전, 지면 일생의 개망신이라는 압박감을 좀처럼 떨치지 못하는 듯 했다.
그 압박감을 선수 개개인이, 코칭스태프가, 대표팀의 시스템이 이겨내지 못했다. 즉 ‘멘탈 스킬’이 부족했다.
2. 그런데 그 부족했던 멘탈이 ‘헝그리 정신’이라니. 이 무슨 박정희 전두환스러운 소리인가.
아무리 져서 화나고 선수들을 비난하고 싶더라도, ‘배가 덜 고파서’가 할 소리인가. 그러면 불과 2년 전 프리미어12는 배가 고파서 우승한 건가.
일제와 군사독재의 적폐를 청산하자는 시대에, ‘정신적 적폐’의 대표주자인 ‘헝그리 정신 부족’을 대체 언제까지 들어야 하는 건가.
개인적으로는 두 경기의 결과보다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혹은 받아들이지 못 하는 이 사회의 후짐이 훨씬 개탄스럽다.
3. 원래 김인식 감독이 발휘하는 ‘국제대회 마법’의 정수도 ‘멘탈 게임’이었다.
국내의 많은 지도자들은 큰 경기의 압박감에 스스로 먼저 무너진다. 벤치에서 초조해하고, 선수들을 탓하고, 주변 상황을 탓하고, 평소에는 안 쓰던 작전을 남발하다 경기를 망친다.
투수에게 “내가 책임질게, 가운데로 던져!”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지도자들 중에, 실제로 가운데로 던져서 홈런 맞았을 때 책임지는 지도자는 극히 드물다.
김인식 감독은 예외적인 케이스였다. 특유의 어눌하고 느릿한 말투로 “걍, 세게 쳐~~”라고 말하는 할아버지 감독은 선수들을 탓하지 않았다.
어지간하면 대회 시작 전에 정한 선수들의 역할을 대회 중에 바꾸지 않았다. ‘문책성 교체’같은 건 없었다.
국제대회의 극심한 압박감을 견뎌야 하는 선수들의 어깨에, 짐 한 덩이를 더 얹어주는 행동이나 언행을 가장 덜 하는 감독이었다.
이번에는? 예전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부족한 훈련 기간을 아쉬워하고, 없는 선수들을 아쉬워하고, 상대가 강하다며 불안해 하고, 여론을 신경쓰고, 4번타자로 낙점했던 선수를 개막 전날 라인업에서 제외하고…
흔들리는 감독의 모습은 선수들의 멘탈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천하의 명장도 ‘홈에서 열리는 국제대회의 압박감’은 이기기 힘든 것이었을까.
4.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압박감에 대처하는 멘탈 스킬이 그렇게 간단한 영역이었다면 ‘스포츠 심리학’이라는 학문이 존재했을까.
거꾸로 보자면, 이 문제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있다. 멘탈 코치를 고용하는 메이저리그 팀들처럼, 멘탈 게임에 대한 과학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닐까.
어제 방송에서 후배들의 헝그리 정신 부족을 비난했다는 선배는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다. “우리 때는 그런 거 없어도 잘 했어”
부산에서 서울까지 걸어가던 시대가 있었다. 걸어가도 갈 수 있다. 과거에 그랬으니, KTX 놔두고 걸어갈텐가?
5. 사실 한국야구계가 이번 대회를 앞두고 준비한 ‘필승 전략’은 오랜 합숙훈련이었다.
한국 대표팀은 이번 대회 참가 팀 중 가장 오랫동안 함께 모여 훈련한 팀이었다. 2월 13일에 대표팀이 공식 소집됐다. 대회 개막 3주 전이었다. 2월 1일 괌 미니캠프부터 시작하면 한 달이 넘는 합숙훈련이었다.
우리만큼 WBC에 목숨을 거는 일본 대표팀도 2월 23일에야 소집됐다. 나머지 대부분의 팀들은 지난주에야 처음 모였다.
오랜 합숙훈련이 컨디션을 높이는데 효과적이라면, 우리는 좋은 성적을 냈어야 한다. 그런데 선수단의 컨디션은 정상과 거리가 멀었다.
부상자가 속출했다. 양의지, 서건창, 박석민, 김재호, 이용규, 허경민이 모두 부상으로 신음했다.
‘4강 신화’를 이룬 2006년 대회에서는 개막전을 12일 앞두고 소집됐다. 결승에 올랐던 2009년에는 15일이었다. 베이징올림픽 때는 12일이었다.
이번 대표팀보다 빨리 소집된 경우는 딱 한 번. 2월 12일에 소집된 2013년 WBC 대표팀이었다. 당시 참가국 중 가장 긴 소집 훈련을 소화한 뒤 3월 2일 1차전에서 네덜란드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러니까 매우 작은 샘플사이즈지만, 훈련기간이 길다고 컨디션이 좋아지고 성적이 잘 난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