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라후프, 풋볼공 때리기, 그리고 많은 시행착오들 : 알렉 봄에게 길을 찾아준 타격코치의 노력

알렉 봄은 필리스에서 최고의 데뷔 시즌을 보냈으며, 올해의 신인상 수상자로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늘 성공을 향해 달려오진 않았다. 2018년 시즌에는 단 하나의 홈런도 치지 못했고, 그 해 당겨서 뜬 공이 하나도 없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올 시즌은 이 젊은 선수의 노력이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이다.

이 성공은 그와 함께한 코치에게도 공이 있다. 필리스의 타격 코디네이터이자 드라이브라인의 타격 디렉터인 제이슨 오차트가 그 중 하나이다. 오차트의 공헌을 되짚어 보기 위해서는 충격에 빠진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왔던 2010년으로 돌아가야 한다. 훌라후프와, 간헐적인 풋볼공 때리기  훈련, 그리고 종종했던 “해피 길모어” 훈련의 시간으로 말이다. (주: 해피 길모어는 우연히 골프 대회에 나가게 된 아이스하크 선수 길모어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여기서 해피 길모어 훈련이란 앞 혹은 뒤로 스텝을 밟으면서 티배팅을 치는 훈련을 뜻한다.)

오차트는 자신의 동생 애덤의 코치였다. 건장한 체격의 그는 고등학교에서 야구에 전념하기 위해 육상과 미식축구를 포기했고, 글렌데일 커뮤니티 대학교에 진학했다. 제이슨 코치는 타격에 관한 인터넷의 모든 정보를 모았고 읽었으며, 그렇게 쌓은 지식으로 동생의 성공을 돕고자 했다. 동생을 더 높은 곳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동생은 슬러거가 되기는 커녕 슬럼프에 빠졌다. 그의 타구는 내야를 벗어나지도 못했다. 결국 글렌데일 야구팀에서 쫓겨났다. 제이슨은 좌절했고, 애덤은 우울의 늪에 빠졌다. (애덤은 이를 두고 “거대한 종말이었습니다, 나는 18살에 불과했는데 더이상 야구를 할 수 없었죠.”라고 말했다). 야구에 대한 둘의 몸부림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던 그 해 가을, 애덤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난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습니다. 내가 그를 망쳤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했죠. 겨울 휴식기에 집에 가서 설명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난 그동안 동생에게 했던 그 쓰레기 같은 코칭들을 그에게서 지우기 위해 노력했죠.  그때가 코치로서 가장 바닥을 쳤을 때입니다. 동생은 나를 완전히 믿고 있었고 모든 훈련을 따라왔지만 아주 명백하게, 또 객관적으로 봐서도 오히려 나빠지고 있었죠. 죽을 것 같았습니다. 내 동생이었고, 또 그를 실망시켰기 때문에 코치 커리어 동안 가장 힘든 시간이었어요.”

애덤이 말했다.

“형은 심한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형은 내게 원인을 찾아냈다고 말하며 올해 몇 번이나 공을 빠뜨렸는지 묻더군요. 글렌데일 외야 펜스 뒤에는 LA 강이 있었고, 꽤 먼 거리였습니다. 난 그 강에 공을 빠뜨려 본 적이 없어요. 난 그 절반의 거리도 날려 본 적이 없습니다. 형은 내게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에 그 강에 일상적으로 공을 날려보내게 될 것이라고 하더군요.”

제이슨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들은 곧바로 훈련에 돌입했다. 앞 발을 일찍 내려놓는다는 생각을 버렸고, 장작 패기나, 공의 윗부분을 때린다는 생각, 또 땅볼을 치고 빠른 주력을 무기로 삼겠다는 생각도 날려버렸다. 뱅가드 대학에서 제이슨은 몸의 동작을 연구하는 운동학을 공부했다. 그때 한 특별한 과제가 타격에 대한 그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학교 과제 중 하나를 위해 전 스포츠의 동작을 관절 하나하나 구분해봐야 했죠.”

제이슨이 회상했다.

“그래서 전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매니 라미레즈를 선택했고, 동작을 관절 하나하나 분리시켜보았어요. 그랬더니 매니는 제가 코치하기 전의 동생의 동작을 그대로 하고 있는 것이었어요. 머리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고, ‘오 하느님, 제가 뭔 짓을 한거죠’라고 되 뇌이기 시작했습니다. 전 배리 본즈와 수많은 좋은 선수들을 관찰했고,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잘못하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의 오차트는 자신의 운동학 학위 덕분에 논문을 읽고 정리하는 법도 배웠다. 구글 스콜라에서 야구에 대한 간단한 검색을 해본 그는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그는 무게가 가중된, 즉 웨이트 배트로 배트 스피드를 올리는 법에 대한 Coop DeRenne의 연구를 읽은 순간을 기억한다.

“전 집에서 테이프를 이용해 어설픈 웨이트 배트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 후 훈련은 그 테이프로 마구 감은 배트가 안내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공의 안쪽 아래를 때려서 배팅장 오른쪽 위 코너로 보내. 2루수 위를 넘겨서 할 수 있는 힘껏 높이 때려”

이것이 애덤이 기억하는 그의 숙제였다.

“지금까지 우리가 했던 것은 공의 상단을 맞히라는 것이었죠. 전 코치들의 스케줄을 연구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수업 중이라 제가 타격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게 했죠. 다른 선수들은 제게 대체 뭐하고 있냐고 다그쳤습니다. 또다른 선수들은 마치 자신의 작품을 모든 이들 앞에서 불태우는 예술가를 보는 듯 바라봤죠. 하지만 그런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요? 전 어차피 하는 것이 없었는데 말이죠. 제가 사막 위에 있는데 콜라 캔을 발견했다면, 그것이 비현실적인 행운일지 몰라도 확인은 해봐야 하는 것이지 않을까요?”

제이슨이 집에 웨이트 배트와 웨이트볼을 가져오면서 훈련은 더 이상해졌다. 그는 동생이 과녁으로 쓸 수 있게 배팅장 위쪽에 훌라후프를 달았다.

그는 동생 애덤을 아웃시킨다는 일념 아래 하루 한시간 마운드 앞에 섰다.

“전 실제 경기 같은 훈련을 만들었어요. 레이더건을 쓰고, 구종을 섞어가면서 말이죠. 하루에 400-500개의 공을 던져줬습니다. 내 팔꿈치가 터져나갔고, 타구에 맞기도 했어요. 동생과 했던 최고의 훈련은 제가 마운드에 올라 두시간 동안 동생을 아웃시키려 한 것이었죠. 결국 제 팔꿈치 인대가 끊어졌어요.”

그는 동생에게 해피 길모어 훈련을 시켰다. 앞으로 나가며 스윙하고, 뒷걸음치며 스윙하는 훈련이다.

“처음에는 해피 길모어 훈련이 어처구니 없다고 생각했어요”

파워 향상의 효과를 즉각적으로 본 애덤은 솔직히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글렌데일의 코치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코치들은 그저 운이 좋았다 생각했어요. 그들은 내 스윙이 바뀐 것을 알고 면담을 했습니다. 코치들은 ‘안돼. 이건 먹힐리 없어’라고만 했죠. 하지만 청백전에서 전 그 누구보다도 강한 핵폭격을 때리는 선수였습니다. 전 블루제이스에서 던졌던 투수의 공도 담장 너머 강으로 넘겨버렸어요.”

애덤은 팀으로 가는 길도 눈치를 봐야 했다. 유니폼이 제공되는 명단에도 없었지만 어떻게든 등번호 5번을 얻어냈고, 겨우 훈련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많은 기회가 주어지진 않았다. 그저 몇번의 대주자와 대타가 전부였다. 하지만 애덤은 시즌이 끝나자 12타수 6안타에 장타율 1.000 정도의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렇게 2학년이 되었다.

“그쯤되자 인정할 수 밖에 없었죠. 코치들은 날 넣을 수 밖에 없었어요. 전 그 해에 리그 베스트 9에 선정됐죠.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제게 잡일을 시키고, 주축 선수들과 배팅 훈련을 함께 못하게 했어요. 타격을 가르친다는 것은 정치가 종교 같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고 플레이오프가 다가왔다. 리그 형식으로 세 경기를 치르게 되고, 애덤은 두번째 경기에서 세번의 삼진을 당했다. 세번째 경기에서 글렌데일은 그 전해 화이트삭스에 드래프트 되었던, 전국 최고 투수상 수상자를 상대로 탈락의 위기에 놓였다. 애덤은 연속된 삼진과 타격 방법에 대한 신뢰 부족을 이유로 선발에 들지 못했다. 그리고 코치들은 그를 3점 차로 뒤지고 있던 만루 기회에서 대타로 기용했다. 골든 웨스트 커뮤니티 대학교 운동장은 왼쪽 외야 밖 365 피트 지점에 공동묘지가 있었다.

“한편의 서사시였죠”

애덤은 기억을 떠올리며 흥분했다. 제이슨 역시 생각에 잠겼다.

“제 야구 인생 전체를 통틀어서 최고의 순간은, 동생이 플레이오프에서 때린 만루홈런입니다.”

그때부터 애덤은 장학금 제의를 받았고 팀의 모두가 제이슨에게 코치해주길 부탁했다. 애덤은 학생으로, 또 제이슨은 수석 코치 역할로 멘로 대학교를 선택했다. 현재는 밀워키 브루어스의 선수 육성 디렉터가 된 제이크 맥킨리는 코칭 스태프를 모집하고 있었고 거포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들은 당시로는 이해하기 힘든 아이디어를 통해 팀을 개선시키려 하고 있었다.

“우리에겐 다운 스윙을 하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 스윙이었죠. 전 배팅 케이지 구석에 놓인 미식축구 공을 발견했습니다. 투수 중 한 명이 워밍업을 할때 쓰던 것 같은데, 아마 그 투수는 자신이 두고 간 공으로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제이슨이 회상했다.

“전 그 공을 티 위에 두고 끈을 살짝 아래를 보게 돌렸습니다. 시각적으로 좋은 과녁을 만들고 싶었죠. 그 끈을 치게 하면서 어퍼 스윙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좋은 시각을 통해 선수들이 올바른 스윙을 하도록 자신의 몸을 조정하게 만드는 것이죠. 배팅 케이지 안에서 선수들이 케이지 상단으로 공을 날려버리도록 만들었습니다. 배팅 케이지는 미식축구장 바로 옆에 있었고, 전 선수들에게 나가서 경기장에서 때려보자고 말했습니다.”

많은 팀원들이 이 훈련을 “눈이 휘둥그레” 떠지는 놀라운 훈련으로 기억한다. 제이슨에게 있어 꿈만 같은 해였다. 그는 맥킨리의 사무실에서 살다시피하며 밤새 야구 얘기를 나눴다. 청소부가 아침에 출근해 커피를 내리기 직전에 일어나, 새로운 하루를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동생은 미친듯한 타격을 보여주고 있었고, 팀은 학교의 모든 공격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었다. 제이슨도 인정했다.

대단한 날들이었어요. 그 해에는 모두가 절 연금술사처럼 여겼죠. 한 해에 70개 홈런을 치던 팀이 93개를 쳤고, 게다가 더 성장하고 있었어요. 나아가 사람들은 제게 제 동생이 자신들을 암흑기에서 구해줬다고까지 말했죠.”

그곳에서 제이슨은 코치로 성장했다.

전 코치로서 제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죠. 전 원래 내성적인 사람입니다. 전 상대의 얼굴에 대고 환호성을 지르는 성격이 못되지만, 진지하고 늘 떠들썩하게 소리지르는 사람으로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제 대학 시절 모든 코치들은 아주 시끄럽고 외향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면을 쓰려고 있지만, 진실되진 않았던 것 같아요.


하루는 맥킨리가 제게 말했습니다. ‘난 당신 있는 그대로를 위해 고용했습니다. 재가 아닌 누군가를 연기할 필요는 없어요. 당신은 느긋한 사람이고, 전형적인 캘리포니아 사람이죠. 그냥 자기 자신 그대로 행동하면 선수들이 당신을 좋아할겁니다. 당신이 가진 콘텐츠도 좋으니 자신만의 코칭 특성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거에요’

애덤이 말했다.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는 거는 형의 성격과 맞지 않는 일이었어요. 형은 객관적인 피드백을 주는 사람입니다. 멘로 대학교에서는 모든 것이 측정되고 있었습니다. 측정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현재보다 한참 전의 일이죠. 형은 그저 선수들에게 현재의 상태와, 그들이 목표로 하는 것에 대해 얘기해주죠. 먼저 묻기 전에는 절대 피드백을 주지 않습니다. 누가 도움을 청하기전에 설교부터 하는 사람이 아니죠.”

이런 접근은 오늘날의 코칭에까지 연결되고 있다. 제이슨 오차트는 다른 선수들도 동생에게 하듯 챙겨주고 있다. 마이너리거 포수 로건 오호피가 말했다.

“제이슨은 그냥 우리 중 한 명인 것 같아요. 다가서기 쉽고 너무 격식 차리지도 않죠. 하지만 예의 바르고 새로운 생각에 열려있어요. 그와는 늘 좋은 대화가 오가죠. 대화 첫 마디부터 알 수 있습니다. 그에겐 선수가 먼저이고, 그 다음이 야구죠.”

마이너리그 내야수 켄달 시먼스의 말이다.

“좋은 사람이에요. 선수를 위할줄 알죠. 그는 진심으로 선수를 챙기고 선수에게 최선을 찾습니다. 그는 우리 모두를 믿고 매일매일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뽑아내려고 하죠.”

그는 여전히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기술과 데이터를 접목시키려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까지 받아들인다.

“과학은 거짓말하지 않아요. 분명 필요한 시간과 장소가 있습니다. 가끔 우린 너무 깊게 들어간 나머지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할 때가 있어요. 하지만 올바른 시간과 장소가 있다는 것은 분명해요.”

봄의 생각이다. 그는 타자들이 스윙을 개선하기 위해 사용하는 웨어러블 장비 K-Vest의 초기 사용자다.

“우리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여주죠. 그 장비는 내 손이 몸보다 더 일찍 나간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덕분에 전 연습 스윙을 할때 그 생각을 짧게 하고 들어갈 수 있게 되었죠. 모든 경기가 촬영되어 있습니다. 트랙맨도 있죠. 모든 장비가 다 있습니다. 그는 제 골반이 제일 먼저 움직였을때 얼마나 좋아졌는지 숫자로 보여주었습니다.”

마이너리거 내야수 브리선 스톳이 말했다.

“스윙할때 손이나 팔이 먼저 나오면 숫자가 떨어집니다. 그러면 그가 자신의 핸드폰으로 제 숫자를 딱 보여주죠.”

그는 여전히 복잡한 타격 훈련을 만들어내지만, 타격 철학은 이해하기 쉽게 간단히 말한다. 이에 대해 알렉 봄은 이렇게 말한다.

“제이슨은 장비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잘 설명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정보들을 논리적으로 연결시키는 일을 아주 잘하죠.”

오호피가 이어나갔다.

“코치는 좋은 사람이에요. 멋진 사람이기도 하죠. 그는 모든 것을 편안하게 만들어줍니다. 우린 상황을 어렵게 만드는 많은 일들을 상대해야 하지만, 코치는 늘 좋은 대화를 해주고 적절한 타이밍에 딱 맞는 말을 할 줄 알죠.”

오늘날 제이슨 오차트는 그 행복한 얼굴과 타격에 대한 최고의 연구, 데이터 그리고 기술에 대한 지식 속에서 평온하게 지내고 있다. 이제 미식 축구공과 훌라후프는 더이상 없지만, 자신이 망칠 뻔한 동생과 그 끔찍한 코칭에서 배운 교훈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애덤이 의자를 뒤로 빼며 말했다.

“뭐, 굳이 따지자면 형은 끔찍한 코치는 아니었어요. 그땐 우리 모두가 끔찍했던 걸요.”

번역 : 한범연

(원문기사)

Fear, footballs, failure: How the hitting director behind Alec Bohm found a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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