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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국대회 스위치 투수

닥터블루님께서 코치라운드 뉴스레터 12호에 보내주신 글입니다.

4회 말 마무리 투수 등장

2022년 5월 4일 제18회 천안흥타령기 전국 초등학교 야구대회 16강전, 4회 말 아이가 투수로 올라왔다. 첫 타자 삼진, 두 번째 타자는 내야 땅볼 아웃, 그렇게 투아웃까지 잡은 상황에서 상대 팀의 1번 타자가 등장했다. 그런데 아이가 갑자기 글러브를 반대 손에 끼더니 오른팔을 힘차게 돌리기 시작했다. 우타자가 나오자 우투로 바꾼 것이다. 그동안 양투를 연습하기는 했지만(얼마 전부터 양투글러브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닝 중간에 타자에 따라 팔을 바꾸어 스위치 투구를 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시합에서, 그것도 전국대회에서. 걱정과 기대가 섞인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팀은 역전에 실패해 아쉽게 지기는 했지만, 아이는 4회와 5회를 무실점으로 스위치 투구를 하며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우리에게 이날은 또다시 ‘생애 처음’이라는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았다.

아이가 사용 중인 양투글러브, 손가락이 6개이다.

부상

2년 전 왼 팔꿈치의 통증이 시작되었다. 왼손잡이라 좌투좌타로 야구를 시작했고, 야구를 너무 좋아해서 쉬지 않고 공을 던졌다. 그래서 전형적인 과사용 손상인 ‘리틀리거 엘보우’가 발생한 것 같았다. 쓰로잉이 금지된 약 3개월의 기간 동안 너무 심심해하는 아이를 위해 우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너무 엉망이라 아무런 기대도 없었고 그저 심심풀이 정도로 시작을 했다. 그리고 부상에서 회복되어 다시 좌투를 할 수 있게 된 시점에는 조금 실력이 늘어 캐치볼을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어 나의 놀이용 팔이 되었다. (부상 이후로 우리는 과사용을 방지하기 위해 학교훈련 이외의 시간에는 좌투를 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시간이 될 때마다 ‘바보팔’이라 불렀던 오른팔로 캐치볼을 하고 놀았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조금 놀라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니콜라이 번스타인의 이론과 다이내믹 시스템 이론, 그리고 비선형 교육학에서 이야기하는 운동기술학습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이상적인 자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나 언어적 지시가 없어도 아이는 놀이를 통해 스스로 투구자세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으며(자기 조직화), 연습시간이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충분한 휴식과 의도가 있으면 계속 실력이 향상될 수 있고(반복 없는 반복), 운동기술은 연습량과 시간에 비례해서 느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갑자기 향상(비선형적 운동학습)된다는 것이었다.

도전

1년 후 다시 왼 팔꿈치 통증이 찾아왔다. 이때 나는 용기를 내어 감독님을 찾아가 그동안의 상황을 설명하고 부상 기간에 우투로 훈련을 하면 어떨지와 향후 양투에 대한 도전을 상의드렸다. 그런데 면담을 하고 나간 직후 우투글러브를 가지고 나가신 감독님이 곧바로 아이에게 공을 던져보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 순간 아이의 가능성을 보아서였을까? 아니면 그냥 재미있는 놈이라고 생각해서였을까? 어쨌든 며칠 후인 2021년 6월 12일 저학년 연습경기에서 처음으로 우투 선발의 기회를 주셨다. 이렇게 빨리 기회를 주실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자세도, 제구도 엉망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닝을 잘 마무리했고, 이날이 우리에게는 또 다른 꿈을 꾸기 시작한 너무 기쁜 날이 되었다. 다시 왼팔이 회복된 후에는 시합에서 우투의 기회는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초등학교 졸업 전에 정식경기에서 우투로 마운드에 한 번이라도 서 봤으면 좋겠다는 꿈을 가지고 우리는 계속 우투연습을 하며 놀았다.

새로운 시작

작년 12월 다시 가벼운 팔꿈치 통증이 있어 바로 좌투는 휴식을 하기로 했다. 반대투구가 가능해진 이후로 가장 좋았던 점은 조금이라도 아프면 바로 쉴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플 때 병원에서 엑스레이검사를 해보면 구조적인 이상은 없다고 했다. (대부분 아픈 걸 참고 계속 던지다가 심한 부상으로 어어지게 된다) 그렇게 동계기간 동안 우투로 학교훈련을 하며 6학년을 맞이했다. 6학년, 드디어 고학년의 시작인데, 완전하지 못한 왼팔과 아직은 부족한 오른팔로 시즌을 시작하게 되어 많은 아쉬움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6학년의 첫 시합인 선수촌병원장기 야구대회는 투수에 대한 기대 없이 수비와 타격에 집중하기로 하고 경기에 출전했다. 그런데 첫 시합인 16강전에서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가게 되었다. 그것도 우투로 말이다. 중간계투로 나와 위기도 있었지만 1.1이닝 무실점으로 피칭을 했다. 1년 전 꿈꾸던 일이 현실이 된 날이었고, 또한 성공적인 데뷔까지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한 달 후, 이 대회의 준우승으로 출전권을 획득한 전국대회(흥타령기)에서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스위치 투구까지 하게 되었다. 아이가 어떤 야구인이 될지,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처음’으로 기억될 이런 날들이 아이의 야구 인생에서 새로운 전환점이 된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좌투는 오버핸드, 우투는 사이드로 투구를 하고 있다.

신경가소성과 가능성

신경가소성(神經可塑性, neuroplasticity)이란 “뇌가 새로운 학습이나 경험에 따라 기존의 신경망을 새롭게 구축하면서 그 형태를 바꾸어 나가는 특성”을 말한다. 21세기 신경과학에서 신경가소성의 발견은 인간의 뇌가 얼마나 유연하게 변화하며 학습할 수 있는지를 증명한 귀중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어린 뇌는 신경가소성이 가장 뛰어나다. 이런 이유로 나이가 들어 시작하면 불가능한 일도 어린 시절에 시작하면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류현진 선수처럼 주팔이 아닌 팔로 야구를 시작했지만, 최정상의 프로야구선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아이에게 꿈을 높게만 꾸지 말고 넓게 꾸라고 한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마치 몽상가처럼 다양한 꿈을 꾸라고, 삶이 너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아직 모르는 거라고. 우리에게 상상력과 노력만 있으면 가능성의 문은 활짝 열리게 된다.

프로선수라는 전문가가 되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너무 좁은 길을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어린 나이에 시작되는 스포츠 전문화(early sport specialization)가 오히려 운동능력의 발달과 운동선수로서의 경력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많은 연구 결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엘리트 체육의 현실 속에서 다양한 스포츠를 경험 할 수는 없지만, 야구라는 스포츠 내에서도 우리는 너무 빠르게 포지션을 정하고 전문화의 길을 선택하지는 않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어른들이 아이들의 성장 가능성과 뇌과학의 결과들을 믿는다면 적어도 아이들의 야구판에서는 좀 더 재미있는 일이 많이 벌어지지 않을까? 그리고 머지않은 미래에 오타니와 같은, 어쩌면 오타니를 뛰어넘는 선수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1년 365일 한 종목에서 벗어나 시즌제로! (나카무라 유타카, IMG 아카데미)

이런 일들에 대한 개인적 논리 – 경쟁이 아니라 성장과 발달을 선택하다.

첫째, 부상 방지 즉 과사용 손상(overuse injury)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양투가 가능하면 한쪽 팔이 아프거나 불편하면 바로 휴식을 취할 수도 있고, 또한 반대 팔로 훈련을 지속할 수도 있다. 즉 일거양득(一擧兩得)의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둘째, 근육불균형(muscle imbalance)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좌투좌타로 야구를 시작했기 때문에 편측성 운동으로 초래되는 근육의 불균형이 장기적인 성장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이의 신체에서 그런 변화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느낌의 전이(transfer of feeling)이다. 움직임의 언어는 느낌이다. 그래서 코칭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지도자의 느낌을 아이에게 전달하는 것이며 그런 이유로 느낌이 결여된 단순한 지시언어는 코칭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느낌은 움직이는 몸(moving body)속에서 어느 순간 불현듯 찾아온다. 나는 오른쪽으로 훈련하는 과정에서 찾아오는 움직임의 느낌이 왼쪽으로 전이될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하다고. 내 느낌과 기억은 아이에게 설명할 순 있어도 전달할 수는 없다. 어쩌면 이 주관성(subjectivity)의 문제를 잘 풀어나가면서 서로 느낌을 공유하는 것이 훌륭한 코칭의 핵심일 수 있다. 그러나 양투를 하며 한 몸에서 일어난 느낌은 온전히 아이의 것이니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나는 아이와 시간을 보내면서 실제로 이런 경험을 하곤 했다.

끝으로

황당하고 무모한 도전을 흔쾌히 허락해주시고, 또 응원해 주시는 학교의 감독님께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이 모든 일에 개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또한 훌륭한 지도자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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