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선수는 단순해야 한다는 말

얼마 전 프로야구 중계를 보다가 재밌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LG 트윈스의 김현수 선수가 홈런을 치고 덕아웃으로 들어왔습니다. 옆에 있던 문보경 선수가 다가와 “체인지업이었어요?” 하고 물었고, 김현수 선수가 “몰라!”라고 답을 하는 모습이 방송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글로 적으니 퉁명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김현수 선수의 “몰라!”가 후배의 질문이 귀찮아서 툭 내뱉은 말로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타자가 최고의 경기력을 보여주는 순간에 그의 의식consciousness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려주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https://youtu.be/IrTNdVixDB4

​김현수 선수는 날아오는 공을 인식하고 배트를 내서 공을 때리는 1초도 안되는 그 순간에 “몰라!”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빠져들어간 듯합니다. ‘체인지업이구나. 타이밍을 조금 늦춰서 때려야지.’라는 생각도 당연히 일어나지 않는 정신적 모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수없이 입력된 타석에서의 시각정보와 시행착오를 통해 세포 하나하나에 저장된 움직임이 그 순간 펼쳐나온 것 뿐입니다. 김현수 선수의 “몰라!”는 어떤 의미에서는 ‘하지만! 내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어!’ 라는 뜻이 숨어있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이는 흔히 말하는 ‘공보고 공을 쳐라. 운동선수는 단순해야 한다’는 야구계의 오랜 잠언과도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경기 중에 쓸데없는 생각은 대체로 경기력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래서 많은 선수들은 저마다의 루틴을 만들어 마운드나 타석에 들어서기 전에 생각을 비우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운동선수는 단순해야 한다’는 말이 남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말이 모든 상황에서 유익한 메시지인지 저는 의문입니다. 특히 일부 지도자분들 중에는 선수가 나름대로 공부한 이론을 적용하거나, 새로운 도구를 이용하거나, 영상이나 데이터 피드백을 활용해 연습하는 것 등을 탐탁치 않게 여기며 ‘운동선수는 단순해야 한다’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운동은 몸으로 하는거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말이죠. 이런 말은 코치와 선수의 대화를 가로막을 뿐 아니라(이런 말을 들은 선수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운동에 대한 오해(과연 사람의 움직임은 몸의 작용에 국한된 것인가)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에 주의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작년 도쿄올림픽 미국대표팀에서 선발투수로 활약했으며 올해 샌디에고 파드레스의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한 닉 마르티네스 선수는 일본 NPB에서 선수생활을 하며 드라이브라인의 피치디자인 인증과정과 랩소도의 교육프로그램을 온라인으로 수강하였습니다. 공부를 하며 허벅지 근육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투구폼의 문제를 발견했고, 이것을 개선해야 지면반력을 보다 잘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공부한 것들을 바탕으로 축이 되는 다리를 조금더 오래 지면에 머물게 해서 뒤쪽 고관절이 보다 빠르게 회전할 수 있는 투구폼으로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랩소도를 보며 피칭을 하면서 자신의 구종들을 조금더 날카롭게 가다듬었습니다. 일본으로 오기 전보다 7km/h 가까이 패스트볼 구속을 향상시키며 2021년 시즌에 149이닝 1.62의 평균자책점을 찍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이 소망하던 메이저리그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닉 마르티네스처럼 어떤 거창한 교육과정을 선수들도 찾아 공부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아닙니다. 하지만 저마다의 관심과 학습능력을 발휘해 필요한 정보들을 찾아나서고, 그것들을 자신의 동작이나 기술에 적용시켜 보려는 선수의 노력을 존중해 주면 좋겠습니다. ‘운동선수는 단순해야 한다’는 말은 마운드와 타석, 그리고 공을 잡고 던지는 ‘바로 그 공간과 시간’을 위한 통찰력있는 메시지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밖의 상황에서 이 말은 선수의 자발적인 탐구와 자기주도적인 연습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코치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는 선수를 코치도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김현수 선수의 “몰라!”는 저에게, 1초도 안되는 타석에서의 ‘그 순간’을 무념무상의 상태로 움직이기 위해, 머리와 몸으로 치열하게 싸워온 자의 사자후로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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