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한 도시를 가르는 하얀 공 (이딴게 내 응원팀이라니 7편)

2022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는 1차전부터 4차전까지 응원용 앰프 사용 없이 치러졌다. 그리하여 중계방송 음향은 중계진의 목소리와 더불어 양 팀 관중의 육성 응원과 생생한 현장음으로 채워졌다. 1차전부터 양 팀은 역전과 재역전을 반복하며 치열한 승부를 펼쳤고, 중계를 시청하던 나는 무심코 생각했다.

‘이거 낭만 있고 괜찮은데? 앞으로도 앰프 안 쓰면 좋겠다.’

그리고 잠시 후 아차, 싶었다. 앰프를 쓰지 않은 이유가 퍼뜩 생각났기 때문에. 갑자기 집에 편하게 앉아 한국시리즈를 지켜보는 나 자신이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졌다.

경기보다 더 치열한 예매 전쟁을 뚫고 매 경기 직접 야구장을 찾아 ‘육성 응원’에 참여한 친구도 비슷한 마음을 토로했다. 정규시즌 한 경기가 아닌 왕좌를 두고 다투는 한국시리즈다. 앰프가 없으니 더 큰 목소리로 치열하게 응원을 해야 했는데,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사람이 많이 죽었는데 어디선가는 환호하고 열광한다는 게 좀 미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얼마만큼’ 소리를 내야 하는지, 혹은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다고도 했다. 특히 한국시리즈 5, 6차전에서는 다시 응원용 앰프 사용을 재개하였는데 이 역시 조금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고도 했다. ‘집관러’인 나와 ‘직관러’인 친구가 모두 공통적으로 낯설고 부자연스러운 감각을 공유한 셈이다.

내가 응원하는 키움 히어로즈가 4차전을 승리로 장식하며 시리즈 전적 2승 2패 동률을 이룬 휴식일, 어쩌다 보니 <비정성시>(1989)라는 영화를 보게 됐다. <비정성시>는 대만의 국민당 정부가 반정부 시위에 나섰던 비무장 시민들을 학살했던 이른바 ‘2.28 사건’을 최초로 극화한 영화다. 베니스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황금사자상) 수상작인데, 이 영화를 만든 허우샤오시엔 감독은 “황금사자상이 아니었으면 팔다리 하나쯤은 없어졌을 지도 모르겠다.”고 뼈 있는 농담을 남긴 바 있다. 재미있는 건 그렇게 정치적으로 민감한 영화인 것치고는 정말 ‘무슨 말인지 알아먹기 힘들게’ 만들어놨다는 사실이다. 영화를 다 보더라도 “그게 그 얘기였어?”라고 말하게 되기 십상이다.

갑자기 영화 얘기를 꺼낸 이유는 ‘집관러’인 나와 ‘직관러’ 친구가 공유한 이 낯설고 어색한 감각이 <비정성시>가 자아내는 느낌과 꼭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집요하게 보여준다. 그렇지만 절대로 전부 보여주지 않는다. 가혹하고 잔혹한 폭력은 멀리서 찍히거나 생략된다. 감옥으로 끌려갔던 주인공이 당한 폭력을 묘사하기 위해, 카메라가 보여주는 것은 그늘 속에 힘없이 작게 웅크려 앉은 주인공의 모습이다.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운명을 암시할 때마다 일상을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거나 음악을 연주한다. 비극이 일상의 일부가 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 불일치와 역설 속에서 우리는 고통스럽게 상상해야 한다. 거대한 폭력이 낳은 그 시대의 피비린내 나는 공기를. 역사는 언제나 흐르고 도시는 비정하며 그럼에도 누군가는 노래하며 음악은 흐른다는 것을.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엔딩곡이 흐를 때, 음악을 듣는 관객은 지금까지 살고 있던 평화로운 공간이 갑자기 낯선 공간으로 변한 것처럼 느끼게 된다. 마치 “나, 이렇게 평화롭게 살아도 돼?” 하고 묻듯이. 이게 바로 나와 내 친구가 한국시리즈를 보면서 공유했던 바로 그 느낌이었을 것이다.

“지금 야구, 봐도 되는 걸까? 그리고 이렇게 열광해도 되는 걸까?”

‘비정성시’, 비정한 도시라는 뜻이다. 도시는 비정하고 사람은 죽어가도 음악이 흐르듯, 누군가는 수많은 죽음을 뒤로 하고 비정한 도시를 가르는 하얀 공을 치열하게 좇는 풍경을 상상한다. 누군가의 죽음을 가깝게 인지하고 감각하면서 우리는 더욱 생생하게, 하지만 고통스럽게 ‘살아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때로 부조리한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내가 한국시리즈를 보면서 스스로의 열광 혹은 분노를 낯설어했듯이. 내 친구가 육성 응원을 어색해했듯이. 이처럼 우리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참사의 아픔을 공유하지만 독립 개체로서의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고, 삶을 이어 나가야 한다. 그렇지만 그건 결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프로야구가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팀 스포츠인 것처럼 말이다.

2022년 10월 29일은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모두가 이 낯선 감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 삶은 계속되고 다음 시즌을 향해 시계바늘은 움직인다. 이제 우리는 스토브리그에 접어들었다. 지난 시즌을 냉정하게 복기하고,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시기다. 부디 현명한 스토브리그를 보낼 수 있길 바란다. 그 과정이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작가 소개 : 구슬
KBO리그와 히어로즈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언제 망하는지 두고보자며 이를 갈게 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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