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의 시험에 강한 한국식 공부

뉴스레터 17호 ‘코치라운드 생각’입니다. 김용일 코치님의 강연을 듣고, 또 노르웨이 유소년 스포츠에 관한 기사를 접하고 떠오른 생각을 몇 자 적어봤습니다. 이 글을 보고 현장의 코치님 몇 분이 피드백을 주셨는데요. 그 내용도 한번 정리해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지난 학부모 오프 테이블에서는 김용일 LG 트윈스 수석 트레이닝 코치님을 모시고 강연을 들었습니다. 코치님께서는 프로팀에서의 오랜 트레이너 생활과 류현진 선수 전담 트레이너로서 미국에서 경험하고 온 것들, 그리고 운동학습이론의 관점에서 우리 유소년 야구에 중요한 화두를 던져주셨는데요. 음식은 골고루 먹으라고 하면서 왜 운동은 편식(!)을 하게 하냐는 말씀이 크게 와닿았습니다. 결국 어릴 때부터 너무 야구만 해서 야구선수로 크게 자라지 못한다는 메시지였는데요. 어릴 때는 야구기술을 늘리는데 시간을 쏟기 보다는 여러 종목을 경험하며 신체의 기능을 골고루 발달시키는데 보다 신경을 써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호에서는 노르웨이의 유소년 스포츠 환경을 소개하는 글을 전해드렸습니다. 동계올림픽 최강국으로 알려져 있는 노르웨이는 인구가 불과 500만명이 조금 넘는 나라입니다. 전해드린 기사에 소개되어 있듯 스키와 같은 겨울스포츠 뿐만 아니라 축구, 골프, 테니스, 육상 등 다양한 종목에서도 세계적인 선수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스포츠를 경험하는 모든 순간에 즐거운 경험을 하도록 한다’를 모토로 어린이들이 여러 스포츠를 경험하도록 국가적으로 스포츠클럽 제도를 적극적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스포츠 강국 노르웨이가 유소년 스포츠를 보는 관점

어릴 수록 여러 스포츠를 경험하도록 해야 한다는 김용일 코치님의 말씀이나 노르웨이의 사례를 접하면 선수나 부모 입장에서는 마음 한구석에 살짝 불만섞인 생각이 올라옵니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그렇게 이것저것 할 수가 없는 환경인데 어쩌란 말인가?’ 엘리트 야구부에 속한 유소년 선수가 팀의 일정을 무시하고 자신만의 스케쥴에 따라 시간을 보내겠다고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야구를 하고, 가을부터 봄까지는 농구를 한다? 그것을 허용할 팀이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한 종목을 선택하는 순간 1년 365일(!!) 선수와 부모의 삶은 그 팀의 일정에 따라 흘러가게 됩니다. 물론 미국이나 유럽처럼 스포츠클럽들이 자원봉사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 않기에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고용문제도 함께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우리 스포츠의 많은 현안들은 실은 스포츠의 관점이 아니라 노동과 교육의 관점에서 푸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 아닌가 가끔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자가 명확한 의지를 갖고 있으면 저런 이상을 어느 정도는 실천할 수 있을 겁니다. 아이들의 성장단계에 대한 이해, 그리고 운동학습이론에 대한 공부를 꾸준히 하는 지도자라면 비록 여러 스포츠를 경험하지는 못하더라도 그에 준하는 체험을 제공할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의 토너먼트 중심의 유소년 대회들은 그런 지도자들의 노력을 별볼 일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기에 지도자의 의지에 호소하는, ‘승부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는 수백 마디의 주문보다 노르웨이의 사례처럼 승부에 집착할 필요가 없는 대회환경을 만드는게 실제 지도자의 행동변화를 촉발하는 터닝포인트가 될거라 저는 생각합니다. 어린 선수들의 장기적인 성장에는 토너먼트보다 리그가 더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나온지 10년도 넘었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유소년 야구대회는 토너먼트로 열리고 있습니다. 오늘 져도 내일 다시 경기가 있는 환경, 30~40경기를 승패에 관계없이 느긋하게 할 수 있는 여건이라면, 그래서 1년에 한두 대회는 우승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유소년 지도자가 운동을 지도하는 방식도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환경과 제도의 개선을 통해 풀어야 할 과제들을 개인의 의지 문제로 돌리면서 같은 문제가 계속 반복되는 것을 방치하고 있습니다.

제도와 행정에 관한 아쉬움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기에, 지금의 엘리트 야구부 구조에서 김용일 코치님의 메시지를 조금이나마 실천할 방법이 무엇인지 지도자, 학부모 모두 고민해 보았으면 합니다. 여러 스포츠를 경험한다는 것이 신체와 정신에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들여다 보아야 볼 필요가 있겠죠. 그것은 결국 다양한 스포츠가 제공하는 색다른 과제들을 풀어나가는 과정 속에서 보다 풍부한 움직임을 체험해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부를 한다고 하면 교과서와 문제집 몇 개를 깊게 공부하거나 비슷한 문제들을 반복해서 풀기 보다는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가볍게 접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 저도 많은 우리나라와 미국의 유소년 야구팀의 연습풍경을 접하며 인식한 차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넉넉한 훈련시간 탓인지 하나의 드릴이나 연습을 오래 가져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짧게는 10~20분, 길게는 1시간 이상 하나의 연습을 반복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렇게 하면 그 동작에 대한 숙련도는 짧은 시간 동안 높아지게 됩니다. 하지만 제가 미국의 마이너리그와 유명 아카데미의 유소년 선수 연습장면을 관찰했을 때, 그곳에서는 하나의 연습을 5분 이상 하는 경우도 많지 않았습니다. 대신 비슷해 보이는 다양한 드릴들을 10회 이내로 반복하고 다음 드릴로 넘어가는 순환식 훈련방식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예를 들어 수비연습을 한다고 하면 무릎 꿇고 맨손캐치 5번, 글러브 끼고 5번, 서서 원핸드와 백핸드 섞어서 5번, 팬케이크 글러브로 바꿔서 5번, 전진 러닝스로우 5번, 이런 식으로 정해진 시간에 최대한 다양한 드릴을 세팅하는 방식입니다. 배팅연습도 티배팅 5번, 토스배팅 5번, 무거운 배트로 5번, 짧은 배트로 5번, 배팅머신 5번, 이렇게 우리 기준으로 보면 하다 만 것(!) 같은 느낌의 연습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집중력을 높이는 순환식 훈련방식

​우리처럼 어떤 특정 연습에 충분한 시간과 양을 투자하는 방식은 단기간에 동작이나 기술을 익힐 수 있게 해주는 분명한 장점이 있습니다. 공부로 치면 바로 눈 앞의 시험은 잘 칠 수 있게 해주죠. 하지만 재미도 많이 떨어지기에 오래지 않아 정서적으로도 소진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과도한 반복훈련은 운동감각의 발달을 방해한다는 운동학습 분야의 연구들도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위에 소개해 드린 다양성에 기반한 방식은 코치나 선수 모두 실력이 늘고 있는지 확신이 잘 서질 않습니다. 나아졌다는 느낌(!)이 팍팍 오지 않는 것이죠. 당장의 경기와 시험에도 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렇게 입력된 움직임 정보들이 완성된 신체와 만나면, 그리고 스스로 발전하고자 하는 동기와 결합하면 비약적인 도약이 일어납니다.

​리틀야구의 우승이 성인야구의 실력으로 이어지지 않는 현실, 엄청난 선행학습이 학문적인 도약으로 이어지지 않는 우리 입시중심 교육이 안고 있는 공통된 과제를 우리는 수십년째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책없이(!) 이야기가 점점 커지고 있어서 이쯤에서 적당히 마무리해야 할 듯 합니다. 기본기가 중요하다는 말에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기본기가 중요하다는 ‘말’은 이제 그만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당위를 넘어 구체적인 다음 질문으로 나아갔으면 합니다. 기본기란 정말 무엇인가? 아이들의 성장단계에 따라 그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그것들을 아이들이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전달할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있는 논의가 시작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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