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와 코치의 멘탈관리

뉴스레터 34호 코치라운드 생각입니다.

월드시리즈 2차전. 0대2로 지고 있는 투아웃 3루 상황에서 수비의 에러로 필라델피아는 한 점을 더 내줍니다. 감독 입장에서는 천불이 나는 상황인데요. 방송 카메라가 그 순간 바로 롭 톰슨 감독을 비춰주었습니다. 톰슨 감독은 들고 있는 종이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습니다. 순간 ‘욕을 적었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독이나 코치가 경기 중에 펜을 사용해 기록하는 모습을 미국과 일본 야구에서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3군팀이 우리나라를 돌며 연습경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경기를 현장에서 관람할 때 눈에 들어온 장면도 코치들이 노트에 계속해서 메모를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마이너리그도 직접 경기장에서 관람한 경우가 제법 되는데요. 그때마다 코치들은 수첩이나 종이에 기록원이 기록을 하듯 저마다 무언가를 계속 적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적나 궁금해서 가까이 가서 보니 코치들마다 적는 것들은 조금씩 달랐습니다. 대단히 특별한 내용을 적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기록지를 적듯 경기상황을 써놓는 코치도 있었고, 실제로 기록지를 채워나가는 코치도 있었습니다. 경기를 마치고 선수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적기도 했습니다.

기록은 일단 1차적으로 데이터로서의 가치가 있습니다. 경기 중에 벌어진 일을 직접 기록하고 정리하는 시간을 통해 코치는 팀과 선수에 대해 보다 객관적으로 인지하게 됩니다. 백핸드 캐치를 놓쳤는지, 송구가 땅볼이 되며 에러가 나왔는지 하늘로 솟구쳤는지, 투수가 안타를 맞고 커버플레이를 제대로 들어갔는지 등등 기록지에는 담지 못하는 플레이의 세밀한 내용들을 적고 쌓아 나가면 일반적인 데이터 분석을 통해서는 알 수 없는 정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정보가 쌓이면 선수마다의 어떤 패턴이 드러나기도 할테구요. 경기를 마치고 보다 구체적으로 피드백을 해주는데도 도움이 될겁니다.

저는 코치가 경기를 보며 기록를 하는 행동이 비단 정보의 측면 뿐만 아니라 감정컨트롤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오랜 전부터 생각해 왔습니다. 경기가 뜻하는대로 풀리지 않으면 지켜보는 코치의 마음에는 수많은 감정들이 올라옵니다. 인간의 감정은 강력한 에너지를 품고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혀 거친 말과 행동을 쏟아낸 경험을 한 번쯤은 다들 해보셨을거라 생각합니다. 많은 유소년 경기에서 일부 지도자들이 아이들에게 내뱉는 몰상식한 말들과 태도들도 결국은 일어난 감정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데서 기인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렇게 감정이 훅(!!) 올라오는 상황을 방치하면 자연스럽게 감정에 이끌려 행동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감정은 이성을 마비시켜, 입은 거칠게, 표정은 험악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하지만 롭 톰슨 감독이 보여준 모습처럼 ‘바로 그 상황’에서 펜을 들고 무언가를 적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이것은 일종의 ‘주의attention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기법이 됩니다. 선수들이 타석과 마운드에서 루틴을 가져가는 이유와 같습니다. “화를 내면 안돼. 침착해야 해.” 이렇게 생각으로 감정을 다스리려고 하기 보다 배트를 한번 쳐다보거나 전광판을 보면서 심호흡을 크게 하는 등 특정한 행동을 반복하면서 불필요한 생각과 감정으로부터 빠져나오는 루틴을 가지고 있는 선수들이 많습니다.

기록을 하는 행동도 선수의 그런 루틴처럼 코치의 마음에 작용하게 됩니다. 종이에 경기의 상황을 담담하게 적는 10초 정도의 시간 동안에도 활화산같은 감정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감정이 어떻게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지냐고 의심하는 분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 이런 예를 하나 들어볼까 합니다. 부부나 연인이 심하게 다투는 와중에 한 사람에게 전화가 옵니다. 잠깐 통화를 하고 다시 싸움을 이어나가려고 하지만 상대를 향한 불같은 감정은 이내 사그러든 상태입니다. 감정이 이전같지 않으니 싸울 의지도 스르륵 꺾이게 됩니다. 제가 실제로 겪었던 일입니다. 코치의 기록하는 행동이 바로 그런 전화 한 통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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