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백호, KBO리그, 그리고 영광의 시대 (이딴게 내 응원팀이라니 9편)

제 이름과 만화 <슬램덩크>는 무관합니다. 아버지는 <슬램덩크>를 모르십니다.

KT를 대표하는 젊은 거포 강백호가 야구선수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이래 수백 번은 반복해서 들었을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부친이 늦둥이 아들에게 귀하게 자라라며 지어주셨던 이름 ‘백호’가 공교롭게도 국민적인 인기를 얻은 농구 만화 주인공의 이름과 꼭 같았던 탓에, 데뷔 초반 그는 인터뷰 때마다 언제나 짓궂은 질문 세례에 시달려야 했다. 다행히 현실의 강백호가 데뷔 첫 해부터 압도적인 천재성을 발휘하며 만화 속 강백호의 활약상을 능가하자, 적어도 야구팬 사이에서 이 실없는 질문들은 자연스럽게 사그라들었다.

그런데 최근 만화 <슬램덩크> 극장판인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개봉하면서 ‘강백호’ 라는 이름이 다시 화제가 됐다. 야구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조차도 “야구선수 중에서 강백호가 있다며? 당연히 <슬램덩크>에서 따서 지은 이름이지? 농구는 잘 한대?” 라는 확신에 찬 ‘야알못’ 질문들을 쏟아냈다. 야구선수 강백호가 지금까지 느껴왔을 피로감이 나한테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이 정도니 선수 본인은 오죽하랴.

활약상만 살펴보면 농구의 강백호보다는 야구의 강백호가 몇 수는 위다. 농구 쪽 강백호는 일단 ‘농구 천재’를 자칭하는 불량학생 출신 ‘초짜’다. 재능은 있다. 농구 입문 4개월 만에 전국대회에 진출할 정도로 체력과 센스는 뛰어나다. 하지만 농구 경력이 짧은 탓에 좌충우돌 실수를 연발한다. 이에 비하면 야구 쪽 강백호는 ‘엘리트’ 그 자체다. 서울고 3년 내내 투수로서는 150km를 넘나드는 강속구를 던지고, 타자로서는 홈런을 펑펑 쏘아 올리며 ‘야구 천재’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했다.

프로 데뷔도 화려했다. 전체 1순위로 KT 위즈에 지명된 그는 데뷔 첫 타석부터 홈런을 때려내면서 ‘야구 만화’ 주인공 같은 신고식을 치렀다. 신인왕 역시 그의 차지였다. 그 이후에도 소속팀 KT 위즈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끄는 등 지금까지 프로야구 정상급 타자로 활약하고 있다.

사람들이 ‘야구 천재’보다 ‘농구 천재’에 열광하는 게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이룩한 업적의 차이만 놓고 보면 야구 천재 쪽이 월등히 뛰어나기 때문이다. 현실의 운동 선수와 만화 속 캐릭터를 동일한 차원에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어째서 강백호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현실의 야구 천재가 아닌 만화 속 농구 천재의 아우라를 먼저 호출하는 것일까? 단순히 만화가 히트해서? 수많은 만화 속 이름들 중에서 왜 유독 ‘강백호’라는 동명이인이 주목받는 것일까? 그것은 다듬어지지 않았을지언정 날카롭게 살아 있는 어떠한 매력이 ‘농구 천재’에게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감독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입니까? 난, 지금입니다!

주전이 빠지면 돌아가지 않는 습자지처럼 얇은 스쿼드. 상대는 전국 최강팀. 아주 근소한 차이로 지고 있는 상황. 그리고 어쩌면 선수 생명이 위태로울지도 모를 등 부상을 당한 상태. 이 때 (자칭) 농구 천재는 자신을 경기에 내보내 달라고 감독인 안 선생님 앞에서 시위하며 이 대사를 내뱉는다. 이 장면을 보고 스포츠 만화 팬으로서 눈물 짓지 않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책장 너머의 우리가 눈물짓는 것은 단순히 그가 선수 생명을 걸고 무리해서 출전을 자청했기 때문이 아니다. 팀 동료들이 전국 최강팀 앞에 주눅 들었을 때 홀로 “이긴다!”며 상대팀 응원단으로 가득찬 관중석을 도발하기도 하고, 아웃되는 볼을 온몸으로 걷어내다가 부상을 당하는 등 플레이 하나하나에서 묻어나는 촌스러울 정도로 간절한 승부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선언한다. 승리를 추구하며 치열하게 달리는 지금이 내 ‘영광의 시대’라고. 불량학생으로 살다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노력해본 것이 농구라는 그의 전사를 떠올려 본다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 감정 이입을 극대화하기 좋은 매체인 만화의 세계와 현실 세계를 비겁하게 일대일로 비교할 생각은 없다. 인생이란 만화나 영화처럼 하이라이트라는 게 따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더 위대한 것이기도 하니까. 그렇지만 나는 야구 팬으로서 ‘야구 천재’의 진정한 ‘영광의 시대’를 기다리고 있다. ‘야구 천재’ 강백호 하면 떠오르는 대중적 사건은 ‘2020 도쿄 올림픽 태도 논란’ 이다.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은 2020 도쿄 올림픽 야구 동메달 결정전에서 패배하며 충격의 무관에 그쳤고, 당시 강백호는 더그아웃에서 무기력하게 껌을 씹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며 국민적인 공분을 샀다. 누군가는 야구를 보지 않는 사람들이 경기를 시청하며 쓸데없이 논란이 커졌다고 했지만, 내 기억상으로는 야구팬들 역시 많이 화를 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많은 이들이 경기 결과에 분노하고 실망했던 만큼이나 그에게 한국 프로야구를 이끌어갈 새로운 스타로서의 품격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에게 숫자 이상의 것을 바랐던 팬들이 그만큼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농구 천재’ 강백호가 갖고 있는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다. 지고 있지만 결코 무기력해지지 않는 것.

2022년, 언제나 잘 칠 것만 같았던 강백호는 데뷔 후 가장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며 힘든 시즌을 보냈다. 그럼에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대표팀 사령탑 이강철 감독은 강백호의 WBC 승선을 결정했다. 이강철 감독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많은 이들이 ‘야구 천재’ 강백호에게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3할 타율도, 30홈런도, 100타점도 아닌 ‘영광의 시대’의 재현일 거라고 생각한다. 이기고 싶은 마음, 지고 있어도 무기력해지지 않는, 어떻게든 발버둥치고 몸부림쳐 보는 촌스러운 마음. 그 마음들이 승리로 연결된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납득할 수 있는 간절한 과정들. 강백호는 “올림픽 때의 아쉬움은 잊고 다가올 대회에 집중하겠다”며 각오를 다졌다.

2023년 야구 국제대회 달력은 유난히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WBC, 아시안게임, 프리미어 12까지. WBC 대표팀 사령탑 이강철 감독은 “모든 이들이 위기라 말하는데 위기는 곧 기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현장 역시 프로야구 산업의 총체적인 위기를 의식하고, 국제대회 흥행에 책임감을 가지고 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단순히 WBC에서 우승하고,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고, 프리미어12에서 좋은 결과를 거둔다고 한들 위기가 쉽게 타파될까? 출생율 저하, 유소년 야구의 위기, 포스트 팬데믹, 스타급 선수들의 세대교체 실패… 이미 점수차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벌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포기하는 순간 경기는 끝난다. 더 야구답게 말하자면, ‘타임 아웃이 없는 경기의 재미’를 우리 스스로 구현해야 할 때가 됐다. 그 첫 단추에 행운이 따르길 빈다. 영광의 시대를 그리며.

작가 소개 : 구슬
KBO리그와 히어로즈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언제 망하는지 두고보자며 이를 갈게 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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