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치라운드 뉴스레터이딴게 내 응원팀이라니

선수 카드 한 장 (이딴게 내 응원팀이라니 3편)

수많은 스포츠 팬들이 선수도 사람이며 스포츠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것을 자주 잊는다. 한 시즌에만 수백명이 등록 선수로 뛰는 야구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야구선수들은 각기 다른 인격을 지닌 ‘한 사람’이 아닌 ‘선수 카드 한 장’ 정도로 인식되곤 한다.

인식은 언어에도 반영된다. 당장 스포츠 기사와 각종 커뮤니티 게시글을 뒤져보자. 일반적인 관념을 가지고는 이해하기 힘든 표현들이 가득하다. ‘선수를 팔다’, ‘선수를 사다’, ‘트레이드 카드로 쓰다’, ‘트레이드 카드를 맞추다’, ‘선발 카드’ ‘깜짝 카드’…. 유독 ‘카드 비유’가 많이 쓰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사진 출처 : 프로야구게임 H3 홈페이지)

사람에게 날것으로 쓰기에는 지나치게 냉혹한 표현들이 왜 이렇게 예사롭게 사용되고 있는 것일까? 팬들이 인신매매를 마구 일삼을 만큼 잔인해서? 아니면 사람을 이용가치로만 판단하는 속물들이어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팬들이 야구를 매개로 한 가상의 맥락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 맥락 속에서는 승리가 최대의 가치이며, 선수는 승리를 위해 무조건적으로 헌신하는 존재다. 선수의 가치는 기록을 바탕으로 한 ‘야구 실력’으로 측정된다.

그리고 야구 실력을 수치로 환산할 수 있고, 포지션별로 수치가 좋은 선수들을 많이 모으면 모을수록 우승에 가까워진다는 것이 현대 야구를 즐기는 많은 팬들이 공유하는 믿음이다. 이렇게 쌓아 올린 가상의 맥락을 감안하고 다시 보자. 선수가 한 장의 ‘카드’로 보이지 않는가? 소속팀의 전력 상승과 하락을 좌우하는 카드 한 장.

여기에 ‘우리 팀 선수’라는 팬들의 응원까지 더해진다면 어떨까? 조건이 엇비슷하다면 내가 가진 카드가 더 좋아 보이고, 상대 카드는 어떻게든 흠을 잡게 되는 것이 사람의 심리다. 하물며 ‘팬심’이 깃든다면 오죽할까! (이러한 서사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프로야구가 프로레슬링과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양 팀이 트레이드를 단행할 경우, 팬들이 우리 팀에서 빠져나가는 ‘카드 한 장’에 보이는 감정적 낙폭이 클 수밖에 없다. 내가 이 연재물 제목을 ‘이딴 게 내 응원팀이라니’ 라고 지은 이유 또한 거듭된 트레이드와 무관하지 않다.

내 응원팀인 키움 히어로즈는 과거 운영난 극복을 위해 팀의 주력 선수를 내주고 현금을 받아오는 ‘현금 트레이드’를 반복해 왔다. 전력 강화를 위한 트레이드를 해도 모자랄 판에, 팀의 기둥뿌리를 뽑아주고 돈을 받아오다니! 지금까지 많은 추억과 애착이 쌓인 선수들이 떠나는 것도 속상했지만, 우승이라는 프로팀의 지향(일단 명목상은 그랬다)을 보란 듯이 배반하는 모습을 참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이딴 게 내 응원팀이라니!

2011년 송신영, 김성현(히어로즈) <-> 심수창, 박병호(LG) 트레이드 때도 그랬다. 박병호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타자가 됐고, 김성현이 승부조작으로 퇴출된 지금은 누가 봐도 히어로즈 쪽으로 기우는 트레이드라고 평하겠지만, 당시의 평가는 정반대였다. 2011년 상반기 마무리 투수로 잘 나가던 히어로즈 프랜차이즈 송신영, 150km/h에 육박하는 속구를 자랑하던 김성현을 최다연패 투수 심수창, 속 터지는 유망주 박병호로 바꿔오는, LG 쪽으로 한참 기우는 거래였던 것이다. (심지어 LG가 히어로즈에 현금 15억원을 추가로 줬다는 이면계약 파문까지 끼어 있었다.)

트레이드를 빙자한 전력 출혈이 계속되면서, 히어로즈 팬들은 나가는 선수들에 대해 슬퍼하느라 들어오는 선수들에 대해서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못하는 상태였다. 특히 이 트레이드로 팀을 옮기게 된 송신영은 히어로즈 선수단의 정신적 지주로 알려져 있어, 팬들 역시 깊이 마음을 준 선수였다. 나이도 적지 않았던 터라 ‘설마 이 선수를 팔지는 않겠지’ 라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이 선수마저도 팔아치울 줄이야! 이적 선수들을 향한 팬들의 마음이 차가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얼어붙어 있던 팬들의 마음을 녹인 것은 당시 ‘안 터지고 사람 속 터지게 하는’ 유망주였던 박병호였다. 심지어 그는 트레이드의 ‘메인 카드’ 조차 아니었다. 그러나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그의 한 마디가 팬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대강 이런 말이었던 것 같다. 기존 선수들이 떠나서 팬 여러분께서 많이 속상하시겠지만, 제가 더 열심히 잘 하겠다고. 지금까지 선수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유배지 취급 받던 팀의 팬으로서는 생전 처음 듣는 위로였다. 카드가, 살아 숨쉬는 사람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아직까지 트레이드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던 2011년의 이야기다.

이후 프로야구계에서 트레이드가 활성화되면서, 팬들의 감정적 낙차도 예전보다는 줄어든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히어로즈 팬으로서 선수 이적을 바라보는 관점이 예전만큼 날카롭고 예민하지는 않다. 정확히 말하면 지치고 무뎌진 것에 가깝다. 서건창 트레이드와 박병호의 FA 이적 때도 화가 났지만, 예전처럼 하늘이 무너지는 수준으로 분노하지는 않았으니까. (다른 히어로즈 팬들은 박병호 이적 당시 트럭 시위를 벌일 정도로 분노했다.)

가장 최근 트레이드였던 박동원-김태진 트레이드 때도 그랬다. 히어로즈는 작년에 22홈런을 친 포수 박동원을 KIA에 넘겨주는 대신, 내야수 김태진과 현금 10억원, 23시즌 2R 신인지명권을 받았다. 히어로즈 팬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한 시즌이라도 우승을 노려 볼 수는 없었던 거냐고.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팬들의 일갈은 손쉽게 묵살됐다.

떠난 사람은 떠난 사람이고, 팀에 합류한 새 얼굴 김태진은 무난히 적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적 후 타율 3할대를 기록하면서 다양한 수비 포지션을 소화했다. 그런데, 발목 인대 파열이라는 큰 부상을 입고 두 달 가량 결장하게 됐다. 홍원기 감독 역시 검진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엔트리에서 그의 이름을 바로 빼지 못했다고 한다. 다들 안타까운 심정인 것이다.

봄 야구가 모두에게 찬란한 희망의 시간이라면, 여름 야구는 슬슬 현실과 타협하며 계산하기 시작하는 시기다. 또다시 트레이드의 계절이 온다. 서로의 카드를 슬쩍 훔쳐 보기도 하고, 대놓고 견주어 보기도 하고,  바꾸기도 하는 그런 시기. 비유는 힘이 세지만, 언제나 실제로 움직이는 건 사람이다. 모든 사람들의 건투를 빈다.

작가 소개 : 구슬
KBO리그와 히어로즈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언제 망하는지 두고보자며 이를 갈게 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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