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담자와 퍼펙트게임 (이딴게 내 응원팀이라니 2편)

세례를 받았지만 교회에는 나가지 않는 기독교 신자를 두고 ‘냉담자’라 부른다. 주로 가톨릭에서 많이 쓰이는 용어인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1년에 두 번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고해성사를 3년 이상 보지 않은 신자를 냉담자라고 일컫는다고.

프로야구의 세례를 받았으면서도 야구장에 안 가고, 일 년 중에 절반 이상 주 6일 꼬박꼬박 중계되는 정규시즌 경기를 보지 않고, 한 해 결산이라 불리는 포스트시즌과 한국시리즈에도 관심이 없어지는 정도가 된다면 ‘프로야구 냉담자’로 분류해도 될 듯싶다. 그리고 이 구구절절한 조건들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프로야구 팬 경력이 있으면서도 개막전에 설레지 않는 사람’ 정도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 바로 내 얘기다.

이러한 냉담 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닌 것 같다. 4월 2일 개막전이 열린 프로야구 5개 구장 모두가 만원 관중을 동원하는 데 실패했다고 하니 말이다. 1999년 이후 처음으로 벌어진 일이라고 하니, 프로야구 관계자들 모골이 송연해졌을 법 하다. 아니, 꼭 그랬기를 바란다. 지금은 그것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니까.

이렇게 역사상 손에 꼽힐 만큼 뜨뜻미지근했던 개막전, 팬들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SSG 랜더스와 NC 다이노스의 경기가 열린 창원에서는 SSG 선발투수 폰트가 마운드에 머물렀던 9이닝 동안 단 한 타자의 출루도 허용하지 않으며 ‘한국프로야구 최초 퍼펙트 게임’의 대기록에 도전했다.

개막전이 펼쳐지는 동안 밀린 마감을 해치우고, 다른 일을 처리하기에 바빴던 나조차도 SNS에서 ‘지금 퍼펙트 게임 나올 것 같다’는 소식을 접한 다음에는 곧바로 창원 경기를 틀었다. 노히터 정도라면 안 틀었을 터다. 하지만 퍼펙트 게임이라니, 이건 봐야 했다!

다들 아시겠지만, 폰트의 9이닝 104구 9탈삼진 무실점 호투에 비해 결과는 싱거웠다. 10회 초, 침묵하던 타선이 4점을 냈지만 폰트가 10회말을 틀어막기 위해 나서는 일은 없었다. 후속 투수가 김택형으로 교체되면서 기록은 ‘비공인 9이닝 퍼펙트’로 남았다. SSG 김원형 감독은 이날 투수 교체에 대해 “팬들께 죄송하다.”며 당연히 역사적인 기록을 의식했지만 시즌 투수진 부상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냉정한 판단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납득이 가는 해명이었다. 대기록 달성이라는 ‘낭만’보다는 ‘합리’를 의식한 결정이었다.

그로부터 열흘 남짓 지난 4월 10일, 일본 치바현 ZOZO 마린스타디움에서 열린 오릭스 버팔로스와 치바 롯데 마린스의 대결에서 치바 롯데가 애지중지하는 ‘괴물 신인’ 사사키 로키가 역대 최연소(20세 5개월), 최소 경기(데뷔 후 14경기) 퍼펙트 게임을 작성했다. 9이닝 105구 19탈삼진 무실점이라는 무시무시한 숫자와 함께. 13타자 연속 탈삼진이라는 일본 신기록도 따라왔다. 팀은 사사키의 호투에 힘입어 6:0으로 승리했다. 대기록에 따르는 ‘낭만’과 팀 승리로 상징되는 ‘합리’, 두 마리 토끼를 멋지게 손에 쥔 것이다.

한일 양국에서 두 차례나 나온 ‘퍼펙트 게임’이라는 대사건을 두고 뭔가 제대로 된 논쟁의 불길이 타오르지 않는 것에 위화감을 느낀다. 야구는 공 하나하나에 말이 틈입할 여지가 많은 스포츠다. 공 하나하나에 붙은 말들이 이야기가 되고, 그 이야기가 다시 사람들을 불러모아 왔다.

최동원과 선동열의 강속구 대결에도, 이승엽과 우즈의 홈런 레이스에도 이야기가 따라붙지 않았더라면 그토록 많은 화제를 모으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퍼펙트 게임’에 대한 논쟁이 너무 적다. 상대적 비인기팀의 ‘외국인 선수’가 일으킨 시즌 초 단발성 사건이라서 그런 것일까, ‘낭만’과 ‘합리’의 논쟁에서 분명하게 ‘합리’의 손을 들어준 것일까, 그냥 야구 인기가 떨어진 것일까. 아니면 그냥 셋 다일까.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왜, 이렇게 조용하냐는 것이다.

프로야구에서 ‘합리’라는 프레임은 ‘승리’ 앞에서 편의적으로 동원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언제나 단기적인 승리 앞에서 장기적인 ‘합리’는 늘 패배하곤 했다.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갓 지명된 어린 신인 투수가 어느날 매일 나오기 시작할 때, ‘어린 투수에게는 섬세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대체로 힘을 잃었다. 그렇게 잘 던지던 선수는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게 되고, 어느날 팬들은 ‘낭만’을 살려 줄 스타가 없다며 한탄하게 되는 것이다.

사사키 로키는 올해 입단 3년차다. 입단 첫 해였던 2020년에는 트레이닝에만 힘썼고, 실질적인 데뷔 시즌인 2021년에도 2군을 오르내리며 1군에서는 11경기에만 등판했다. 세 번째 시즌인 올해 ‘대형사고’를 친 것이다. 아직도 양현종-김광현을 찾으면서 ‘젊은 선발투수가 없다’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명멸했던 수많은 루키 투수들의 이름을 떠올려 본다.

퍼펙트게임이라는 대사건에도 프로야구를 둘러싼 이야기들은 예전만큼 치열하지 않다. 다시 수많은 이야기들이 활발하게 오갈 수 있는 프로야구를 꿈꿔 본다. 언젠가 우리도 다시, 신화적인 ‘낭만’을 목격할 수 있을 때까지.

작가 소개 : 구슬
KBO리그와 히어로즈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언제 망하는지 두고보자며 이를 갈게 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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