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면 안되는 것을 강조하면

뉴스레터 23호 ‘코치라운드 생각’입니다.

야구에서는 전통적으로 타자의 히트맵을 전력분석과 경기준비를 위한 기본정보로 사용해 왔습니다. 어떤 타자가 어느 로케이션에서 강점과 약점을 보이는지를 빨간색과 파란색 등으로 구분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미지로 보여주는게 히트맵입니다. 그런데 이런 히트맵이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는 점을 롭 그레이 애리조나 주립대학 박사님의 작년 우리야구 컨벤션 강연을 듣고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강연 하이라이트 링크)

그레이 박사의 연구팀은 투수들을 모아서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벽에 타자의 모양과 스트라이크존을 프로젝터로 투사해서 투수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스트라이크존은 아래 보이는 것처럼 4개의 로케이션으로 나누었습니다. 그 중에 투수들이 목표로 해야 할 로케이션은 검은색으로 표시했습니다. 검은색을 맞추면 투수들은 1점을 얻었습니다. 투수들이 던져서는 안되는 로케이션은 빨간색으로 표시했습니다.(아래 그림에서는 회색) 빨간색을 맞추면 1점이 감점되었습니다. 나머지 두 로케이션은 흰색으로 표시했습니다. 흰색은 그냥 0점으로, 점수를 얻지도 잃지도 않았습니다.

연구의 결과가 무척 재밌습니다. 압박감을 느끼는 상황을 만들자 투수들이 점수를 얻을 수 있는 검은색 로케이션으로 정확히 공을 던지는 비율이 확연히 줄어들었습니다. 긴장되는 상황에서 실수를 하는 것은 스포츠 경기에서 흔히 있는 일이기 때문에 이런 모습은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흰색도 아닌 빨간색(사진에서 회색) 로케이션으로 공을 던지는 경우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는 점입니다. 연구팀은 동작분석의 관점에서 그 이유를 찾으려고 해봤지만 별다른 문제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투수들은 마치 빨간색 로케이션으로 공을 던져야 하는 것처럼 움직였습니다.

롭 그레이 교수는 자신의 책 “How We Learn To Move”에서 이런 현상을 ‘역설적 실수ironic error’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역설적 실수는 우리가 하려고 의도하지 않은 ‘바로 그 행동’을 자신도 모르게 하게 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역설적 실수를 설명할 때 자주 언급되는 사례가 바로 그 유명한 분홍색 코끼리입니다. 분홍색 코끼리를 떠올리지 말라고 하면 머릿속에서는 바로 분홍색 코끼리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골프를 치다 보면 가끔씩 하는 경험이 있습니다. 그린 옆에 워터해저드가 있다고 알려주면 묘하게 바로 그곳으로 공을 보내게 됩니다. 그래서 일부 짖궂은 골퍼들은 ‘어? 저기 해저드가 있네? 벙커만 피해서(!!) 날리면 되겠어!’ 이렇게 의도가 다분한(!) 농담을 건내면서 상대의 머릿속에 쓸데없는 정보를 입력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주말 골퍼들에게는 아주 유용한 방법입니다. 투수들도 비슷한 체험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이 타자는 가운데 낮은 로케이션에 강하니까 절대로 그곳으로 던져서는 안된다’고 생각을 하면 이상하게 바로 그곳으로 공을 던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레이 박사는 바로 이런 역설적 실수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핫존(빨간색)과 콜드존(파란색)으로 심플하게 분류한 히트맵 사용을 추천하지 않습니다. 머리에 입력된 히트맵 이미지가 엉뚱한 의도를 심을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역설적 실수라는 현상을 경기장에서 겪을 수 있는,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로 받아들인다면 코치는 데이터를 선수에게 전달하는 방식을 보다 세심하게 선택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수가 해서는 안되는 것을 애써 강조하기 보다는 해야 하는 것 중심으로 알려주는게 좋겠네요. 이를테면 투수에게는 상대 타자가 약한 로케이션만 표시한 히트맵을 보여주는 식입니다.

아래에 소개하고 있는 리암 핸드릭스 선수의 인터뷰를 보시면 Codify라는 사설 히트맵 서비스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방금 소개해드린 개념을 그대로 반영해 히트맵을 만들어 선수들에게 제공하는 곳입니다. Codify에서 만든 히트맵에는 투수가 피해야 할 곳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공략해야 할 곳이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습니다. 선수가 자신도 모르게 엉뚱한 의도(!)에 의해 움직이지 않도록 분명한 신호를 주는 겁니다.

이런 역설적 실수라는 개념은 비단 데이터를 선수에게 전달할 때 뿐만 아니라 경기에서 선수에게 주문을 할 때, 연습에서 코칭큐를 줄 때 등등 여러 상황에서 코치의 주의깊은 언어선택을 요구합니다. “볼넷 내주면 안돼! 높은공에 배트 나가면 안돼! 팔이 퍼져서 나오면 안돼! 툭 갖다 대면 안돼!” 이렇게 말하는 순간 선수의 머릿속에는 코치의 생각와는 다른, 엉뚱한 의도가 (자기도 모르게) 입력될 수 있습니다.

롭 그레이 박사의 관련 논문 링크 https://www.researchgate.net/publication/309955457_Ironic_and_Reinvestment_Effects_in_Baseball_Pitching_How_Information_About_an_Opponent_Can_Influence_Performance_Under_Pressure

롭그레이 박사의 책 ‘How We Learn To Move’이 10월중에 번역출간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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