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벌을 받은 시기에 야구가 향상된 적이 없습니다.” (구와타 마스미)

“저는 얻어맞고서 애정을 느낀 적은 없습니다. 지도자나 선배에게 체벌을 받은 시기에 야구가 향상된 적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체벌에는 반대합니다. 僕は?られて愛情を感じる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指導者や先輩から?罰を受うけていた時期に野球が上達することもありませんでした。だから僕は?罰には反?です.”

일본 프로야구는 물론, 메이저리그에서도 뛴 구와타 마스미의 말이다. 그가 야구를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 동네 소프트볼팀에서 소프트볼을 시작해, 초등학교 3학년 때는 정식 야구팀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매일 고난의 연속이었다. 매일 같이 연습에서 얻어맞았다. 감독은 물론, 선배로부터. 뺨에 손바닥 흔적이 없었던 적이, 엉덩이도 배트에 맞아 부풀어 오르지 않은 적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시대가 바뀐 만큼, 일본에서든 우리나라에서든 체벌에 대해 찬성하는 야구인은 거의 없다. 다만 “체벌에는 반대하지만”이라면 체벌이 필요한 이유나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 등을 이야기한다. 말만 반대일 뿐, 실제론 찬성이다. 찬성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주위의 눈치를 봐서 반대하는 척을 한다. 이것은 체벌뿐만이 아니다.

야구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불상사와 관련해, 대다수 야구인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하지만”이 등장한다. 속내는 “하지만” 이후에 있다.

또 지도자 등의 체벌이 문제가 됐을 때, 등장하는 전가의 보도는 ‘사랑의 매’다. 꼭 야구 선수가 아니더라도, 학창 시절이나 군대 등에서 사랑의 매를 경험해본 이가 얼마나 될까? 누군가를 인격적으로 가르친다는 것은, 그 가르치는 이의 인격이 훌륭해야 한다.

누가 생각해도, 전과 14범인 사람이 다른 이에게 사람의 도리 등을 가르치는 것은 이상할 것이다. 그런데 여러모로 훌륭한 분은 야구계에서 만나기 쉽지 않다. 예수님 말씀처럼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물론, 개인의 인격 이전에, 시스템적으로 잘못된 부분도 있어, 비리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운 상황인 점도 있다. 여기에 잘잘못을 가르는 야구계의 기준은 야구 실력이다. 야구를 잘하면 어떤 행동을 해도 대부분 정당화된다. 거꾸로 야구를 못하면 자기 잘못 이상의 책임을 져야 할 상황도 적지 않다.

게다가, 피해자가 진상을 밝히기도 어렵다. 설령 전학을 가도, 팀 분위기를 흩뜨린 선수(혹은 부모)라는 꼬리표가 끝까지 따라 다닌다. 때에 따라서는, 지도자는 물론, 선수 사이의 왕따도 나온다.

여기에 학부모의 생각 역시 “우리 아이만 피해자가 아니면 돼!” 주전급 선수가 폭행 사건의 가해자일 때는 자기 아들의 진학이나 팀 성적을 걱정한다. 그래서 야구계 폭력이 드러나는 경우가 드문 이유기도 하다.

야구계에는 회고적 신화가 있다. “과거의 어려움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면서 자신감이 생겼다.” 등등. 그렇게 학창 시절의 폭력을 추억으로 여기는 이가 적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야구 실력의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그래서 야구를 잘할 것 같으면, 굳이 펑고 연습 등을 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펑고 대신에 매질. 그러면 야구 실력이 오르지 않는가.

감독 중에는 선수가 잘못했을 때, 폭력을 행사하는 이도 있다. 그런 감독, 경기 중에 작전이 잘못되거나 했을 때는 선수가 때려도 괜찮지 않을까. 이것은 선후배 간에도 마찬가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악행에는 악행으로 갚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적지 않다. 때로는 체벌이 없으면 많은 선수를 관리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하는 지도자도 있다. 이것에 대해 구와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능력이 없어 체벌로 관리하는 이는 지도자로 자격이 없다. 그런 사람은 지도자를 해서는 안 된다.”

손 윤 (야구친구 명언을 찾아서)

군사문화에 바탕을 둔 ‘야구도’의 이념을 바꾸자 (구와타 마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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