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자존심’과 ‘엔딩택’ (이딴게 내 응원팀이라니 4편)

구글에서 ‘서울의 자존심’을 검색하면 최상단에 LG 트윈스 공식 홈페이지가 뜬다. KBO리그 팬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LG 트윈스의 공식 슬로건 덕이다. 익숙한 경기 개시 음악과 함께 잠실벌 외야 끝까지 우렁차게 퍼지는 “서울의 자존심 LG 트윈스!” 구호는 관중석을 가득 메운 홈 팬들의 가슴을 끓어오르게 한다. 비록 ‘신바람 야구’를 앞세웠던 1994년 이후 27년째 자존심을 살리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LG 팬들은 꿋꿋했다. 누가 뭐래도 ‘서울의 자존심’을 외쳤다. 성적이 좋으면 신이 나서, 성적이 나쁘면 나쁜 대로 악에 받쳐서 소리를 높였다. 그럼에도 부진은 길었다. 10년 동안 포스트시즌 탈락을 거듭하는 동안, 팬들은 팀을 향해 무차별적인 애증을 쏟아부었다. 주로 입에 담기도 어려울 쌍욕으로 구현되곤 했던 그 거대한 정념의 한가운데 박용택이 있었다. 팬들은 그에게 열광하는 만큼 가혹했다. 팀이 잘해도 개인 성적이 나쁘면 박용택을 욕했고, 박용택이 잘해도 팀 성적이 좋지 않으면 다시 박용택에게 책임을 물었다. 2011년 잠실구장에서 ‘선수단 청문회’가 벌어졌을 때의 선수단 주장 역시 박용택이었다. (이때 박용택은 “선수단도 부담스럽습니다.” 라는 발언을 하여 ‘부담택’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박용택은 잘하면 ‘용암택’, 못하면 ‘찬물택’ 같은 식의 ‘택’이 붙은 각종 기상천외한 별명들로 유명하다. 그 중에서도 ‘졸렬택’ 이라는 별명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2009시즌, 박용택의 타격왕 등극을 노골적으로 지원했던 소속팀 LG의 ‘기록 만들기’가 논란이 됐다. 시즌 마지막 경기, LG 투수진은 박용택의 경쟁자였던 롯데 홍성흔을 4타석 연속 볼넷으로 내보냈고, 박용택은 타율 유지를 위해 출장조차 하지 않았다. 이를 한 방송사에서 ‘졸렬한 타율 관리’라는 제목으로 보도하며 ‘졸렬택’이 탄생했다.

‘졸렬택’이라는 오명은 박용택이 은퇴할 때까지 발목을 잡았다. 지난 2020년, 프로야구선수협회에서 박용택의 은퇴 투어를 추진하려고 했으나 반대 여론이 일었다. 박용택은 “일이 커진 것은 2009년 타격왕 사건 때문이라고 본다. 팬들은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며 고개를 숙였다. 결국 본인이 은퇴 투어를 포기한다는 뜻을 밝히면서 그의 은퇴 투어는 없던 일이 됐다. 프로야구 통산 최다 안타, 최다 경기 출장, 최다 타석, 최다 타수 및 최초의 200홈런-300도루, 10년 연속 3할 타율, 7년 연속 150안타를 기록한 대타자의 마지막에 어울리지 않는 씁쓸한 사건이었다.

유니폼을 벗은 지 1년 반 정도가 지난 2022년 7월 3일, 박용택은 다시 한 번 ‘졸렬택’을 소환했다. 박용택의 은퇴 경기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박용택의 다양한 별명들을 선수단 유니폼에 달기로 했는데, ‘졸렬택’이 없어서 섭섭하다는 것이었다. 마침 은퇴 경기 상대팀도 2009년 타격왕 논란 당시와 같은 롯데 자이언츠였다. 경기 후 열린 영구결번식에서, 그는 3루 원정 응원석을 향해 롯데 팬들이 남아있는지 물은 뒤 “그 순간 졸렬했을지 몰라도, 진짜 졸렬한 사람은 아닙니다.”라며 웃음을 안겼다.

해도 해도 도저히 안된다고 느껴질 때 (박용택)

그 순간 모두가 웃을 수 있었던 건, 실제로 박용택이 야구장 안팎에서 ‘졸렬하지 않게’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박용택이 팬들이 받아들이는 서사를 충분히 이해한 스타였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타격왕이라는 기록에 집착했던 과거의 오점을 인정하고, 모범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반성하고, 동시에 과거를 유머로 승화함으로써 ‘흑역사’를 ‘역사’로 만들었다. 이렇게 리그의 이야깃거리는 더 풍부해진다. 개인의 입장을 넘어서 팀의 서사, 나아가 리그의 서사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드문 선수임을 박용택은 스스로 증명한 것이다. 본인이 조롱거리가 되는 것조차 감수하면서.

박용택은 스스로 “나는 KBO리그에서 팬들이 가장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선수였던 것 같다.”며, “잘 할 때는 어떤 선수보다 많은 사랑과 응원을 받았지만 못할 때는 엄청난 욕을 먹었고 동시에 ‘우리 선수를 왜 니가 욕해’ 막아주기도 하는 선수였다.”고 스스로를 정의했다. 박용택이 가장 야구를 잘하는 선수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적어도 자신에게 주어진 ‘프랜차이즈 스타’라는 역할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고 수행한 사람이었다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박용택의 뜨거운 안녕에 팬들도 화답했다. 개막전도 외면했던 관중들이 박용택을 위해 잠실구장을 가득 메우며 시즌 첫 잠실구장 매진을 기록했다. 은퇴 이후 판매가 중단됐던 박용택 마킹 키트를 경기 당일 하루만 팔았는데, 하루 판매량만으로 단숨에 올 시즌 초상권료 상위 10위 안에 들었다고 한다.

박용택의 시간은 LG 트윈스의 역사가 되었다. LG 팬들은 박용택을 통해 벅차오르는 긍지를 만끽했을 터다. 이것이 프로스포츠가 팬에게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 아닐까. ‘프랜차이즈 스타’라는 레거시를 구현하고 담아낼 수 있었던 LG 트윈스 구단의 스케일이 부러웠다. 단순히 성적을 떠나서, 이것이야말로 서울 연고의 다른 두 팀이 구현하기 어려운 ‘서울의 자존심’이 아닐까. ‘서울의 자존심’과 ‘엔딩택’의 인생 2막을 응원한다.

작가 소개 : 구슬
KBO리그와 히어로즈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언제 망하는지 두고보자며 이를 갈게 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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