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을 끝까지 보라는 주문에 대하여

야구의 오랜 잠언들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한 내용들이 많다. 그 중에 대표적인 말이 이것 아닐까?

“공을 끝까지 봐라.”

타자가 헛스윙을 하면 이내 듣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모순된 주문이다. 실제 공이 포수의 미트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보고 타격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타자들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을 야구의 오랜 잠언은 최대한 공을 오래 보고 판단하라는 메시지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선두를 달리고 있는 애리조나의 타자들은 ‘공을 끝까지 보라’는 이런 관행적인 지침을 더이상 따르지 않는다. 그들은 터널구간, 즉 공이 투수의 손에서 떠나는 시점부터 이후 몇 미터 구간에 집중해 타격을 할 지 말지를 결정한다.

데이브 마가단 타격코치와 팀 레이커 타격보조코치는 경기가 열리기 전 상대 투수의 피칭영상을 분석하고 전력분석팀이 넘겨준 자료를 조합해 그들만의 새로운 접근법을 준비한다. J. D. 마르티네스의 개인 코치였다가 올해부터 애리조나의 타격전략가hitting strategist로 합류한 31살의 로버트 밴 스코요크가 마련한 기본원칙에 따라 접근한다. 너무나 당연하고 단순한 접근이라 이게 정말 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지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내용이다. 상대투수의 강점에 맞서 싸우지 않고 약점을 공략하는 것이다.

우선 상대 투수의 릴리스포인트, 회전수, 무브먼트와 구속 데이터 등을 바탕으로 타자가 노려야 할 구종와 로케이션을 구분해낸다. 타자의 입장에서 결과가 좋지 않았던 것들은 과감히 버린다. 보다 강한 타구를 생산해낼 수 있는 구종와 로케이션 정보를 바탕으로 그공의 터널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예측한다. 투수의 손에서 공이 떠나는 순간의 각도에 기반해 노려야 할 공이 어느 터널을 지나는지 판단할 수 있는 정보들을 제공한다. 타자들은 타석에 들어서며 ‘바깥쪽 높은 패스트볼을 공략한다’가 아니라 특정터널을 통과하는 공을 머리에 그리게 된다.

구체적인 접근방식은 다를 수 있지만 비슷한 맥락으로 타격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 분이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현재 KBO 육성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용달 코치는 투수의 공이 손을 떠나 미트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세 개의 구간으로 나눈다. 1구간은 투수가 던졌을 때 중간 정도 온 구간, 2구간은 타자가 치기 2~3미터 앞, 그리고 마지막 3구간은 컨택이 이루어지는 지점이다. 김위원은 ‘볼을 끝까지 보라’는 말에 의문을 제기한다.

“실제 컨택을 하는 3구간에서는 볼을 볼 수가 없어요. 타격은 1,2구간의 잔상을 가지고 하는 겁니다. 많은 분들이 1,2구간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볼만 열심히 보려고 하면, 그러니까 3구간만 보려고 하면 실밥도 볼 수 있어요. 그런데 그러면 타격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자꾸 볼을 끝까지 보고 치라고 하니까 중요한 정보를 얻어야 하는 1구간에서의 선구안이 떨어지는 겁니다.”

* 김용달 위원의 타격이론에 관심있으신 분께 최근 개정판이 나온 <용달매직의 타격비법>을 권해드립니다.

마가단 코치는 이런 전략이 특히 특정 로케이션에 강력한 구위를 자랑하는 투수들을 상대로 아주 유용하다고 말한다. 최고 투수들의 필살기는 타자가 아무리 준비를 잘해도 상대하기 어렵기 마련이다. LG트윈스 피칭아카데미원장인 야생마 이상훈 코치도 선수시절 팀의 전력분석원이 상대투수가 바깥쪽 낮은 공을 잘 던지니 주의하라고 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건 아무도 못쳐.”

3루수 제이크 램은 상대 투수의 약점에 초점을 맞추고, 2스트라이크에 몰린 상황에서도 적극적으로 특정터널을 겨냥해 장타를 노리는 팀의 타격전략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바깥쪽 낮은공을 잘 던지는 투수가 있다고 치죠. 만약 그 선수가 그렇게 던지는 영상을 보고 경기에 나선다면 바깥쪽 낮은공에 신경을 쓰게 될겁니다. 그런데 만약 그 투수가 많이 공격당하는 약한 존이 있다면 왜 굳이 투수의 강점에 초점을 맞춰야 할까요? 여길(바깥쪽 낮은공) 잘 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반대쪽을 봐야 하는겁니다. 이건 정말 큰 차이에요.”

‘지식의 반감기’라는 말이 있다. 하버드대학교의 물리학자인 새뮤얼 아브스만 박사가 같은 이름의 책에서 사용한 개념이다. 한때 자명했던 지식이나 이론이 시간이 지나면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거나 효용성을 잃어버리는 기간을 의미한다. 물리학은 13년, 경제학이나 수학은 9년, 심리학은 7년 내외의 시간이 흐르면 정보의 반이 가치를 잃어버린다고 연구결과를 소개한다.

야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회전수와 수직무브먼트라는 개념이 등장하며 투수라면 당연히 ‘바깥쪽 낮은 공’이 첫번째 옵션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도 깨지고 있다. 과거의 내야수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땅볼을 몸의 중심에 놓고 잡아야 한다고 요구받았지만 지금은 백핸드 캐치로 송구동작을 보다 빠르게 가져가는 것도 함께 연습하고 있다. 야구는 계속 진화하고 있고 ‘절대 불변의 진리’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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