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와 공놀이를 사랑하는 ‘재벌집 아들래미’ (이딴게 내 응원팀이라니 8편)

화제의 드라마 JTBC <재벌집 막내아들>을 요즘 열심히 보고 있다. 재벌에 의해 죽임을 당한 남자 ‘윤현우’가 과거로 돌아가 그 재벌집의 막내 손자 ‘진도준’으로 다시 태어나 복수를 꾀한다는 내용이다. 매 회 시작 전 ‘본 드라마 속 인물, 기관, 사건, 지명 등은 실제와 관련 없다’고 친절하게 안내하지만, KTX를 타고 가면서 봐도 작중 등장하는 기업명인 ‘순양’은 현실의 삼성을, ‘대영’은 현대를 가리키는 게 자명해 보인다. 시치미를 뚝 떼고 가공의 세계인 척하지만, 현실과의 유사성을 담보하지 않는다면 이 드라마가 선사하는 재미의 상당 부분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만큼 ‘현대사 기반 회귀물’에서 픽션과 현실의 조각들을 잇는 ‘퍼즐 맞추기’의 즐거움은 강력하다.

현실에서 삼성과 현대가 그러했듯 작중에서도 순양과 대영은 ‘재계 라이벌’ 구도를 이룬다. 드라마 속에서는 두 기업의 라이벌 구도를 상징하는 도구로 모터 스포츠가 사용된다. 두 재벌 가문의 구성원들은 모터 스포츠 경기를 관전하며 자동차 생산력을 경쟁하는 등 기싸움을 벌인다.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를 제작하는 데 여러모로 시간과 자본의 제약이 있었겠지만, 프로야구 장면을 넣었다면 좀 더 리얼리티가 살지 않았을까? 실제 현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현대가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하며 ‘유니콘스’라는 이름으로 뒤늦게 프로야구에 뛰어든 1996년, 현대 유니콘스와 삼성 라이온즈 두 구단 모두 선수들에게 ‘메리트’ 라는 이름의 돈을 풀어 ‘기 살리기’를 하고, “저 팀에게만큼은 져선 안 된다”며 서로 라이벌 의식을 불태웠다. 그러다 6월 2일 인천구장에서 두 구단이 결정적으로 맞부딪치는 사건이 일어난다. 현대가 7:1로 앞서고 있던 9회 1사 상황에서, 현대 정명원이 등판해 삼성 양준혁과 이승엽을 빠른 공으로 연달아 맞히면서 두 ‘재벌 구단’ 선수들 사이에 일대 난투극이 벌어진 것이다.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랬다. 이미 앞선 맞대결에서 여러 차례 몸에 맞는 공을 주고 받으면서 분위기가 과열되어 있던 차에, 현대 투수조의 조장 격이었던 정명원이 홈 경기에서 ‘총대를 메고’ 나선 형국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현장을 지켜본 <일간스포츠> 백종인 기자의 비판적인 평가다.

“프로야구의 주역이어야 할 스타플레이어가 그라운드에서 나뒹구는 모습에서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 는 옛말이 그르지 않다는 걸 실감했다.” (<한국프로야구 난투사> 홍윤표, 재인용)

(관련 기사) 한국프로야구 난투사 정명원이 이승엽에게 빈볼을 놓은 사연…현대와 삼성, 두 재벌의 대리전

프로야구의 주역은 재벌이 아닌 스타플레이어라는 선언이었을까? 재벌 간의 눈꼴 사나운 신경전에 몸이 곧 기량이고 재산인 스타플레이어들이 ‘용병 고용’되듯 소모되어서는 안된다는 문제의식이었을까? 아니면 둘 다였을까? 어쨌든 백종인 기자는 그날 그 현장에서 ‘두 고래의 대립’ 속에 ‘새우’로 전락한 ‘프로야구의 주역’, 즉 선수들에 대한 존중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인식에 도달했던 듯하다.

드라마든, 야구든 시간을 다시 뒤로 돌려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와 보자. 1996년으로부터 26년 뒤인 2022년. 모두가 먹고 살기 힘들다는 불경기 속에서도 그 어느 때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FA, 장기계약 금액들을 보고 있자면 이제는 ‘프로야구의 주역은 스타플레이어’라는 전제를 좀처럼 의심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한편으로 SNS와 공놀이를 사랑하며 자신을 스스럼없이 ‘형’이라고 지칭하는 어느 구단주를 생각하면, ‘진짜 주역’은 역시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에 없던 야구, 세상에 없던 구단주’라는 표현대로 SSG 랜더스와 정용진 구단주의 2022시즌은 화려했다. 개막 이후 한 번도 1위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는 ‘와이어 투 와이어Wire To Wire’ 우승을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달성한 것부터 기념비적이었다. 한국시리즈에서도 ‘연봉총액 9위’ 키움 히어로즈가 일으킨 반란을 제압하며 구단 인수 2년만에 통합 우승을 이뤄냈다. 야구단이 압도적인 기세로 KBO리그를 정복하는 동안 구단주의 존재감은 선수들 그 누구보다도 돋보였다. 시즌 내내 결정적인 순간마다 ‘용진이 형’의 SNS에는 “이게 야구지” 같은 도발적인 게시글이나 경기 정보가 한 발 앞서 올라왔다. 또한 정 구단주는 SNS를 통해 팬들과의 직접 소통 역시 아끼지 않았다. 한국시리즈 우승 기념 사진은 정 구단주를 중심으로 촬영됐고, 모기업인 신세계그룹은 야구단의 빛나는 성과에 맞춰 대대적인 할인 행사를 진행했다. 2021년 야구단 깜짝 인수, 2022년 프로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압도적인 통합 우승, 그리고 이에 발맞춘 공격적인 마케팅까지. 완벽하게 실행된 시나리오에 팬들은 열광했다.

다들 알다시피, 모두가 완벽하다고 여겼던 시나리오에 균열이 생긴 것은 시즌이 끝난 다음이었다. 신세계그룹이 구단을 인수하기 전인 SK 시절부터 구단 운영에 잔뼈가 굵었던 류선규 단장의 갑작스러운 사임과 뒤이은 김성용 단장의 선임에 팬들이 크게 반발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 구단주와 절친한 인물이 구단 운영에 멋대로 관여했다는 ‘비선실세’ 의혹까지 불거지면서 일부 팬들은 신세계백화점 본점 앞에 전광판을 실은 트럭을 보내는 등 ‘트럭 시위’에 나서기까지 했다.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에서 ‘트럭시위’까지, 한 해에 치르기에는 낙차가 큰 행사들이다. 그런 상황에서, 올 한 해 누구보다도 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왔던 정 구단주의 개인 SNS 소개글 변화가 의미심장했다. ‘여기는 개인적인 공간임 소통이라고 착각하지 말길 바람’ (현재는 다른 메시지로 바뀐 상태) 현재 정 구단주의 SNS에서 SSG 랜더스와 관련한 게시글은 모두 삭제된 상태다. 랜더스의 우승 기념 게시글까지.

여기서 ‘비선실세’ 논란을 둘러싼 진실과 구단을 인수하느라 막대한 돈을 쓴 정용진 구단주가 행사한 인사권의 정당성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이번 시즌,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게 있지 않았냐는 것이다. KBO리그 40년 역사상 전례가 없었던, 개막 10연승으로부터 시작된 SSG의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이라는 대업으로부터 우리는 프로야구를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 더 많은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세상에 없던 구단주’ ‘소통왕’ 정용진이라는 밈MEME이 막대한 광고비를 태우면서 수많은 이슈를 흡수해 갈 때 ‘프로야구의 주역’ 이라는 스타플레이어들과 팀 SSG, 그리고 팬들은 뒷전으로 밀린 게 아니었을까? 그런 점에서 26년 전의 문제의식을 모두가 잠시 잊거나, 제쳐 두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점이다.

우민화를 위한 3S 정책(Screen, Sports, Sex)의 일환으로 시작되어, 재벌들에게 ‘광고판’ 격으로 억지로 떠안겨서 만들어졌다는 KBO리그의 태생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BO리그가 40년 동안 한국에서 가장 꾸준히 사랑받는 프로스포츠로 자리매김해온 것은 단순히 위에서 던져준 장난감이었기 때문이어서는 아닐 것이다. KBO리그의 매력이 있다면 아래로부터 참여하여 만들어가고 향유할 수 있는 역동적인 서사일 것이고, 그 서사를 이루는 원천을 꼽는다면 바로 ‘플레이어’가 만들어온 카리스마와 그 카리스마를 끈질기게 지지해온 팬들의 열정일 터다. 물론 재벌과 같은 거대 자본의 투자 없이 현재 프로야구가 존립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렇지만 장기적으로 특정 재벌의 변덕에 의존하는 것이 산업을 풍성하고 다채롭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까? 정용진 구단주가 신세계그룹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선임된지 2년 만에 ‘팩스 한 통으로 해체 소식을 알리며’ 역사 속으로 사라진 신세계그룹 여자농구단 신세계 쿨캣(1998~2012)의 선례를 여기서 굳이 길게 설명하지는 않겠다.

프로스포츠의 인기가 날로 떨어져 가는 시기다. ‘스트레스 해소가 목적이니까 응원하는 팀이 이기는 장면만 보고 싶다’는 이유도 크다고 한다.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이나다 도요시) 다시 말해 ‘지는 경기는 보고 싶지 않다’, 즉 ‘여유가 없다’는 뜻일 터다. 경기 시간이 길고 진입 장벽이 높은 야구는 더하다. 엔터테인먼트 소비 환경의 변화 속에, 언제까지 누군가의 ‘변덕’에 의존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을까? 한국시리즈 기간 동안, 키움 히어로즈 주장 이용규에게 “한국 프로야구의 발전을 위해서는 SSG가 우승해야 한다.”라고 말했던 야구인들이 정말 많았다고 한다. SSG가 우승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새로운 질문에 직면한 것 같다. “그래서, 한국 프로야구의 발전이 뭔데?”

작가 소개 : 구슬
KBO리그와 히어로즈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언제 망하는지 두고보자며 이를 갈게 된 사람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